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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개태사지(論山 開泰寺址).충남 논산 본문

☆~ 절집.절터/충 남

논산 개태사지(論山 開泰寺址).충남 논산

푸른새벽* 2018. 11. 30. 22:32



































































































논산 개태사지(論山 開泰寺址)


시도기념물 제44호(논산시)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29-1외 3필 


지정면적 5,412㎡. 충청남도 기념물 제44호. 개태사 경역은 크게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현재 삼존불의 보호각과 요사체가 있는 지역으로 사찰이 운영되는 현재의 개태사 지역이고, 다른 한 지역은 이 지역에서 동북으로 약 300m정도 떨어진 마을에 있는 유구인데, 이곳이 고려태조의 진영(眞影)을 모셨던 건물지이다.


현재의 개태사 주변과 윗마을 일대에는 광범위하게 건물의 초석과 기단들이 널려 있어 사역이 원래는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제219호)이 자리하고 있는 기단에 대한 발굴조사와 진전(眞殿) 건물지에 대한 조사이다.


1986년 문화재 보존사업의 하나로 보호각을 보수하던 중 건물 해체작업 과정에서 창건 당시의 초석과 기단 석재들이 나타나자 석불보호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지형이 낮은 서쪽 부분에서는 초석들이 없어지거나 이동이 심했으나 동쪽에는 온전히 남아 있어 건물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대석의 모서리를 오목하게 처리하고 그 위에 면석을 세운 위에 지대석과 같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남쪽 중앙에 계단 자리를 凸형으로 만들었다. 초석은 대형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동서 21.5m, 세로 10.3m이다. 동서 기둥 사이의 거리는 중앙칸이 5.1m이고 나머지 기둥 너비는 각각 4.1m이다. 남북간의 기둥 거리는 중앙 칸이 5.1m이고 남북 각 한 칸의 기둥 너비는 2.6m이다.


마을 쪽의 유구는 축대가 세 곳이고 건물지가 두 곳이며, 한 민가의 마당에 초석들이 있다. 발굴지역의 서쪽에 있는 축대는 높이 1.8m 길이 10m정도이다. 진전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89년에 있었다.


진전 자리는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쪽에서부터 경사면에 축대를 쌓아 기단을 마련한 회랑 같은 유구와 그 위의 평지에 마련한 진전 자리이다.


남쪽 건물자리는 높이 3.2m, 길이 50.3m의 축대를 쌓아 마련하였는데, 교란이 심하여 건물의 규모를 파악할 수 없으나 평면형태가 凸형으로, 적어도 2차에 걸쳐 건물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추정되는 건물자리의 크기는 동서 길이 48.9m, 남북 너비 7m정도이다. 마을 남쪽에서 계단을 통하여 진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건물 자리 북쪽에는 남쪽 석축과는 다른 커다란 자연 석재를 이용하여 추정 높이 2.3m정도로 쌓아 진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진전 유구는 중심축이 동으로 24。 기울어져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동서 방향의 기둥 간격은 3.5m로 일정하나 남북 방향의 기둥 거리는 중앙 2칸이 3.5m이고 남·북단(端)의 2칸은 2.4m이다. 여러 번 고쳐지은 흔적이 있으나 구체적인 연대 추정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건물지의 특징은 불단에 해당하는 부분의 기단 유구인데, 중앙 북쪽에 치우쳐 뒷벽을 막은 불단을 마련하고 그 앞에 세 개의 대형 석재를 배치한 것이다. 자금은 변형되었으나 원래는 네모난 석재를 나란히 배치하여 양쪽 석재에는 중앙에 구멍을 파서 기둥을 꽂도록 되어 있다.


구멍의 기능으로 보아 불상을 안치하기에는 모순이 있어 기록에 나오는 태조의 진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양쪽 구멍에 기둥을 꽂아 그림을 걸고 중앙 기단에는 태조의 상을 모셨을 가능성이 있다.


진전 건물과 남쪽의 건물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는지, 또는 다른 시기에 이루어진 별개의 건물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남쪽 건물자리 북쪽의 축대와 남쪽의 축대 축조수법에서 크게 차이가 나고 있어 시대적인 차이가 있는 듯하다.


또 진전 건물에 대한 기록은 고려 초기에는 나오지 않고 말기에 나오고 있어 이 건물은 아래쪽 개태사 건물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진전 자리의 서쪽에서는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동대탑(국보 제213호)이 출토되었고, 진전 남쪽에서는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대형 반자(飯子)가 발견되었다. 그 남쪽 길가에는 담장에 걸쳐 개태사지석조(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5호) 2기가 지하에 묻혀 있다.


그리고 현재의 개태사에 서 있는 개태사지오층석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74호)은 진전자리 서쪽의 축대 부근에서 옮겨간 것이라고 마을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로 보아 초기의 개태사 경역은 지금보다 북쪽까지 확대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논산 개태사지(論山 開泰寺址)


시도기념물 제44호(논산시)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29-1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완전히 물리친 후, 태조 23년(940)에 지은 절이다.


당시 절 안에는 태조의 초상화가 있어서 나라에 전쟁의 기미가 있으면 그 앞에 기원문을 올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왜구의 빈번한 약탈에 의해 차츰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세종 10년(1428)에 옮겨진 것으로, 개태사 안에는 개태사지삼존불상(보물 제219호)이 있고, 이외에도 석탑과 쇠솥이 있다. 전성기에 장국을 끓였다고 전해지는 이 쇠솥은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에 이를 정도여서 수백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전설을 사실로 뒷받침하고 있다.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상의 대좌, 죽대들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반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는 상방산의 한 암자에 안치되어 있다.


개태사터 일대는 삼국시대 후기 신라군이 당과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략할 때 통과한 진격로로, 백제의 계백 장군이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근처 황산벌에서 신라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그후에도 군사·교통의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사찰을 지키기 위해 만든 약 6㎞에 달하는 토성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