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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관촉사관음보살입상(論山 灌燭寺觀音菩薩立像)-은진미륵(恩津彌勒).충남 논산 본문

☆~ 풍경소리/충 남

논산 관촉사관음보살입상(論山 灌燭寺觀音菩薩立像)-은진미륵(恩津彌勒).충남 논산

푸른새벽* 2018. 12. 13. 20:15

















































































































논산 관촉사관음보살입상(論山 灌燭寺觀音菩薩立像)-은진미륵(恩津彌勒)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미륵불이라는 이 부처는 온몸의 길이가 19m,둘레 9.2m,귀 길이2.7m,눈썹 사이 1.8m,큰 갓의 가로 3.3m라는 말만으로도 그 엄청난 크기가 느껴진다.전체적으로 얼굴과 보관이 하나인 머리 부분이 한 돌,가슴께가 한 돌,허리 아래의 몸 해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물 제218호로 지정된 이 부처님은 언뜻 보기에도 온화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예사 부처님과 다름을 알 수 있다.몸체에 비해서 거대한 머리,팽팽하게 팽창한 두 볼이 주는 긴장감,길게 옆으로 찢어진 부리부리한 눈,두꺼운 입술이 그 앞에 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위엄이 서려 있다.


생김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부처의 현신에서도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설화가 전한다.광종 19년(968)에 반야산 앞마을 사제촌에 사는 한 여인이 산 서북쪽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 보니,갑자기 큰 바위가 솟아나왔다.이를 관에 알렸더니 조성에서는"이것은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길조"라고 하며 금강산에 있는 혜명대사를 불러 부처의 조성을 명하였다는 것이다.석공 100명을 거느리고 불사를 하던 혜명은 그 솟아나온 바위로 허리 아랫 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은 그곳에서 12km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의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 일꾼 1000명을 동원하여 옮겨왔다.그러나 이미 솟아 있는 바위가 하도 커서 머리를 올릴 재간이 없어서 근심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부처를 모신다"고 하며 밑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아올려 덮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다시 모래를 쌓은 후 맨 윗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비로소 크게 깨달아 부처를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부처는 세워진 뒤에도 신이한 행적을 많이 전한다.고려 중엽에 거란이 침입하여 압록강을 건너올 때에 어떤 중이 얕은 내를 건너듯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따라 건넜더니 대군이 거의 몰사하게 되었다.
이게 그 대장이 크게 노하여 중을 칼로 치니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와 동시에 이 부처의 갓 한쪽이 바위 위에 떨어져 나갔다.그런데 그 떨어진 부분은 상하지도 않아 그대로 두었다가 조선 숙종 때에 다시 붙여 달았다고 한다.외침에 관한 또 한 얘기는 일제 강점기 무렵에 있었던 것이 전한다.순종 3년(1909)에 일본 사람 셋이 불공을 드린다며 와서 절에서 여러 날을 묵었다.이중으로 갓을 쓰고 있는 부처의 큰 갓 위에 금동화불이 있었다.그런데 그들이 보관 끝에 놓여 있던 그 금부처를 모두 훔치 가고,이마에 있는 광명주마져 깨뜨려 놓았으니 이제 관촉사 은진미륵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신이한 이야기들은 죄다 신통력 넘쳐 보이는 미륵의 생김새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이 부처의 조성배경에서 그 괴력이 뜻하는 바를 읽을 수 있다.무엇보다도 이 부처가 모셔진 자리는 멸망한 백제의 최후의 보루였던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가 그 뼈를 묻었으며 후백제의 근거지로서 강성했던 후백제군을 왕건이 고려를 세우면서 창과 칼로써 제압한 황산벌을 굽어보는 자리이다.또 광종은 각처의 호족 세력을 연합하여 연계를 맺어 세운 고려의 정권에 법제를 정비하고국가체제를 마련하여 왕권 강화를 확립한 왕이다.그러므로 백제이자 후백제의 유민으로서의 의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이곳 사람들에게 고려의 강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이 필요했고 왕권의 화신으로서 그처럼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소유한 듯이 보이는 상징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백호를 수리할 때 먹으로 쓴 글씨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正德 十六年 辛巳 四月 十五日" 이라 하였으니 그해가 바로 광종 19년인 968년이다.


얼굴 생김도 그러하거니와 이 부처의 강력함은 오히려 아래쪽에서 잘 드러난다.몸통 자체가 거의 큰 바윗덩어리처럼 뚝심 있게 서 있으니,그 몸통을 받치고 있는 발을 보면 강력한 힘이 밀어붙여도 끄덕도 않는다는 듯이 든든하게 땅을 거머쥔 발가락이 앞에 나와 있다.


사실감을 나타내려 한 흔적이 전혀 없는 얼굴 생김에 견주어 가슴에 얹은 두 손의 조각은 무척 섬세한 편으로 연꽃 가지를 들고 있고 머리 위에 화불이 있었던 흔적 등으로써 이 부처가 관세음보살임을 알게 한다.아래쪽의 몸 부분은 다시 음각으로 옷 주름 모양만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해탈문을 들어섰을 때 먼저 만나는 관음전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지 않다.법당 안에 들어가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법당의 뒤쪽 벽에 길게 유리창을 두어 미륵불이 보이도록 했다.예불할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부처의 얼굴 부분이 창을 채운다.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시는 배려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論山 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
충남 논산시 관촉동 254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