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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경기 여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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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경기 여주

푸른새벽* 2023. 10. 20. 16:08

 

 

 

 

 

 

 

 

 

 

 

 

 

 

 


여주 신륵사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

시도유형문화재 제128호(여주군)   
경기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282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신륵사에 있는 조선후기 에 중창된 사찰건물. 불전. 시도유형문화재.

198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신륵사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어 1472년(성종 3) 대규모의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는데, 극락보전 역시 왕릉 원찰로 지정되면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800년(정조 24)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실의 원찰답게 부연(浮椽)을 달아 겹처마 지붕을 만들었고, 기둥 사이에도 공간포(空間包)를 올린 다포계(多包系) 구조의 화려한 건물이다. 공포(?包)는 내4출목 외3출목 구성으로 집 규모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이고, 쇠서[牛舌] 위에 연꽃봉오리들을 조각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긴 장대석을 3벌로 정연하게 쌓은 기단과 계단도 조선조 사찰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의 기법들이다. 길게 뻗어 나온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를 받치기 위해 가느다란 활주(活柱)를 시설하였다. 내부에는 목조의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는데, 본존의 높이는 1.5m, 협시보살상(脇侍菩薩像)은 2m이며, 1977년에 개금(改金)한 불상들이다.

후불탱화와 우측의 신중탱 · 감로탱은 모두 1900년 작이고, 좌측의 지장탱은 1908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법당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지만, 불단 상부에는 화려한 닫집을 짜아 내부의 장엄을 더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건륭 38년(영조 49년, 1773년)의 명문이 새겨진 범종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여주 신륵사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

시도유형문화재 제128호(여주군)   
경기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원효가 지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나옹화상이 오면서 크게 번창하였고, 성종 3년(1472)부터는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성종 4년에는 절의 이름을 ‘보은사’라 하였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 한 것은 미륵 또는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말을 막았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말을 인당대사가 신의 힘으로 제압했다하여 마을 사람들이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