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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경기 여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경기 여주

푸른새벽* 2023. 10. 21. 14:01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

국보 제4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있는 고려시대 에 건립된 석조 불탑. 부도. 국보.

높이 3.4m.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기단부·탑신부·옥개석 등을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이나 상륜부는 완전하지 못하다.

기단은 수매의 판석으로 짜인 8각 지대석 위에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굄대를 놓고 그 위에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어 형성하였다. 굄대는 지대석의 8각에 각을 맞추어 놓았는데, 윗면에는 2단의 굄단을 마련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 또한 8각의 모를 맞추었으며 측면에는 각 면 2구씩의 가늘고 긴 안상을 오목새김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지선(地線) 중앙으로부터 올라온 귀꽃 모양 1좌씩을 조식하여 장식적인 안상(眼象)을 꾸미고 있다.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윗면에 16판의 복엽 복련문(覆蓮文)을 조각하였는데, 각 변과 여덟 모서리에 1판씩 배치하였다.

그리고 상단부에는 얕은 1단의 굄으로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 용과 운문(雲文)을 조각하였는데, 귀두(龜頭)는 원각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으나 형식화된 경향이 보인다. 용두(龍頭) 또한 웅장하고 수법이 대담하다.

이들 귀부(龜趺)와 운룡의 조각은 거의 원형의 표면에 돌려져 있는데, 이 중대석의 상하단은 높직한 갑석형을 8각으로 돌려서 상하의 부재에 맞도록 하였다. 8각 상대석은 하면에 깊숙이 받침을 각출하였는데, 대개의 경우 받침단은 밖으로 나와 중대상단보다 더 넓어지고 있는 데 비하여, 여기에서는 반대로 훨씬 좁아지고 있다.

측면에는 여덟 판의 큼직한 복엽앙련을 조각하였다. 상단에는 갑석형을 돌리고 그 위에 3단의 굄대를 마련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에는 각 면에 우주를 모각하고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창살 등을 조각하였는데, 특히 문비와 자물통의 표현이 형식에 흐르고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꺼운 편으로 아랫면에는 깊숙이 낮고 널찍한 받침을 조각하여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 하였다. 낙수면은 석탑 옥개형으로 기왓골 등의 표현이 없으며 낙수면의 합각선이 뚜렷하고,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큼직한 귀꽃 모양이 조식되어 있다.

이 귀꽃 모양은 다른 승탑 옥개석의 귀꽃 모양보다 높은 편이나 표면에 나타난 조각은 가냘퍼 보인다. 옥개석 정상면에는 복련을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는데, 현재는 보개석만이 남아 있다.

보개는 옥개석을 줄여 놓은 것같이 그 조형이 같다. 그 위에 원공(圓孔)이 관통되어 있는데, 이것은 찰주(擦柱)에 꽂기 위한 것으로 화려하였을 상륜을 연상시킨다.

이 승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수법에서 장중한 작풍을 보이고 있다. 건립연대는 중대석의 귀두부와 운룡문·연화문, 탑신부의 조각양식과 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 초기인 10세기로 추정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여주 고달사지 승탑(驪州 高達寺址 僧塔)

국보 제4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