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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경기 여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경기 여주

푸른새벽* 2023. 10. 21. 14:20

2005년 6월의 모습

 

 

 

 

2007년 1월의 모습

 

 

 

 

 

 

 

 

 

 

 

 

 

 

 

 

 

일제강점기 국내의 문화재 약탈을 위해 일제가 작성한 우리 문화재 목록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보물 제6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7-3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고달사터에 있는 고려전기 탑비의 받침돌. 귀부 · 이수. 보물.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2m. 고달사지 금당지와 네모난 석조대좌(石造臺座)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의 대지 위에 있으며 현재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고, 비신(碑身)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진열되어 있다.

귀두(龜頭)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코는 들려서 콧구멍이 깊게 표현되고 중첩된 주름이 정수리까지 이어져 있다.

일반형의 귀부와는 달리 입을 꽉 다물어 여의주를 물지 않은 형태이며, 길게 찢어진 입 가장자리에는 공룡의 깃과 같은 물갈퀴 형상이 조각되었고, 그 뒤로 갈기 같은 털이 머리 뒤까지 길게 뻗쳐 있다.

앞발은 귀갑 전면 양단에 가지런히 두었으나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발톱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그다지 길지 않아 머리가 귀갑에 바짝 붙은 느낌을 준다. 귀갑에는 2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와운문(渦雲文)을 첨가하여 장식하였다.

비좌(碑座) 부분 역시 깊게 조각된 운문(雲文)을 장식하여 돌출시켰고, 위로 복련(覆蓮)을 정연하게 조각하였다. 비좌 위에 얹어놓은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고 고부조(高浮彫)로 입체감을 강조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맨 아래에는 복판(複瓣)의 앙련대(仰蓮帶)를 사면에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전면에는 정중앙의 전액(篆額)을 중심으로 서로 뒤엉킨 반룡(蟠龍)을 구름 사이로 배치하였다. 중앙 상단부와 우측 상부가 깨어졌으나, 좌우로 각각 2마리씩 4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용의 모습은 서로 조금씩 다른 형태이다. 측면부는 용의 몸이 구름에 내비친 격동적인 모습을 조각하였고, 후면 역시 2구의 용을 조각하였다.

이 귀부와 이수는 탑비에 기록된 명문에 의하여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귀두가 험상궂은 용두형(龍頭形)에 가깝고, 목이 짧고 정면 직시형(直視形)인 점,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와운문으로 번잡하게 장식한 점 등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진전되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보물 제6호  
경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7-3  

원종대사는 이름이 찬유(璨幽)로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 90세(승랍 69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여러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불교 발전에 공로가 높았다. 광종은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시호를 ‘원종(元宗)’, 탑호를 ‘혜진(惠眞)’이라 내리었다. 이 탑비는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그를 기리고, 살아생전의 행적을 비문으로 새겨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받침돌의 거북 머리는 목이 짧아 움츠린 형상으로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빨을 악물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매우 강인한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발가락과 발톱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었다. 등에는 3중의 6각형 문양을 정연하게 조각하였으며, 가운데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문양 위에 연꽃이 장식된 비좌를 마련하였다. 머릿돌은 연꽃 받침대 위에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을 구름 속에 새겨 영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상단부에는 큼직한 보주를 끼울 수 있도록 구멍이 있고, 앞면에는 사각형 구획을 마련하여 주인공을 알 수 있도록 글자를 새겼다.

이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은 규모가 상당히 크고, 거북이와 용이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조각 기법을 보여 고려 건국 초기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탑비는 광종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으며, 최고의 장인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진영을 조성하고 승탑과 한 쌍으로 건립하도록 했다.

비문에 의하면 탑비를 세우고 나서 977년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현재의 비신은 재현하여 새롭게 세운 것이고, 원래의 비신은 여주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