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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淸州 飛中里 石造如來三尊像 및 石造如來立像).충북 청주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淸州 飛中里 石造如來三尊像 및 石造如來立像).충북 청주

푸른새벽* 2023. 12. 16. 11:11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淸州 飛中里 石造如來三尊像 및 石造如來立像)

보물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207-1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 있는 삼국시대 에 조성된 석조 불상. 보물.

201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의 불상 예로는 처음 조사된 석조삼존불좌상(石造三尊佛坐像)이다.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청주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 삼존불상은 본존불과 협시보살, 단순한 두광(頭光) 그리고 화불(化佛)을 좌우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상현좌(裳懸座) 아래에 삼존불과 사자(獅子)를 배치한 구도를 보여 준다.

본존불은 타원형의 상체, 턱과 양 무릎을 연결하는 정삼각형적인 안정된 형태, 큼직한 손, U자형으로 무릎을 덮으며 좌우로 내려진 천의(天衣)가 상현좌를 이루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고졸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백제 불상인 군수리(軍守里)납석불좌상이나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출토 납석삼존불상 등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 6세기 초반기의 용문 불상(龍門佛像)을 대표하는 중국화된 양식과 친연성이 있다.

협시보살상 역시 머리칼, 상체의 장식성, X자형 옷주름 등이 동위(東魏)의 금동보살상과 흡사하다. X자형 옷자락 무늬는 6세기 초반기의 특징적인 형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분황사탑의 인왕상이나 비암사비상보살(碑巖寺碑像菩薩) 등의 예처럼 7세기에도 가끔 나타나지만 6세기의 특징적인 형식임에는 틀림없다. 중첩된 광배 형식에서도 6세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는 추상화된 경향이 좀더 짙게 나타난다. 신체의 굴곡은 대체적인 윤곽선밖에 알 수 없는데 석주(石柱)를 적당히 다듬어 몸체를 표현하고 얼굴과 손 그리고 옷자락 무늬를 조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손의 처리, 손과 손의 간격, 짧은 상체 등에서는 비사실미(非寫實味)가 짙게 나타나 연가7년명(延嘉七年銘) 불상보다도 더 고졸한 면을 보여 준다. 이것은 석조각의 기술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형식이나 양식상으로 볼 때 6세기 중엽 내지 후반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또한 발견된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6세기 전반기는 고구려가 50여 년간 점령하였으며 후반기는 신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국적을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6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것이라면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어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3월 11일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은 문화재 구역 및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청주 비중리 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淸州 飛中里 石造如來三尊像 및 石造如來立像)

보물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207-1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에 있는 석불상으로, 하나의 돌에 광배(光背)와 삼존불을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4부분으로 조각나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인데, 왼쪽의 협시보살은 없어졌다. 이 지역은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절터였음이 밝혀졌다. 

본존불은 턱과 타원형의 상체, 양 무릎이 정삼각형으로 연결되는 안정된 자세로 앉아있다. 손은 큼직하게 표현되었으며, U자형의 주름이 새겨진 옷자락은 무릎을 덮으며 좌우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러한 불상양식은 백제불상에서 엿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오른쪽에 서 있는 협시보살 역시 머리칼, 상체의 장식성, X자형의 옷주름 등에서 6세기 초의 불상양식을 보여준다. 

이 불상은 발견된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해 볼 때, 6세기 전반기는 고구려가 점령하였으며, 후반기는 신라의 영토였기 때문에 국적을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불상의 형식이나 양식상으로 볼 때 6세기 중엽 내지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