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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김천 황악산 직지사( 黃嶽山 直旨寺).경북 김천 본문
황악산 직지사( 黃嶽山 直旨寺)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직지사.교리적을 따진다면 선가의 가풍을 적실하게 드러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려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말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겠지만 절 이름치고 사연 한둘쯤 갖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직지사에서 창건주로 모시는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짓고 나서 손을 들어 멀리 서쪽의 산 하나를 곧게(直) 가리키며(指) " 저 산 아래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했다 한다.그 산이 황악산이고, 그 아래 터를 닦은 절 직지사의 이름은 아도스님의 이 말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고려 태조 때 이 절을 크게 중창한 능여대사가 큰 불사를 하면서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만 가늠하여 일을 했으며, 절 이름은 여기서 생겼다는 것이다.
아도화상이 이 절을 창건한 해가 신라 눌지왕 2년,서기 418년이라고 한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직지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큰 절인 해인사나 통도사보다도 훨씬 먼저 세워진 것이 되며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도 전에 그 터전을 닦은 절이 되겠다.
그러나 막상 일주문.금강문.대양문.천왕문.그리고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 마당에 서면 긴 역사를 가진 절이 보일 법한 고풍스런 분위기가 느껴지거나 고격이 우러나는 유물.유적을 대하게 되는게 아니라 새 절에 들어선 기분이 된다.이런 느낌은 넓은 경내를 구석구석 돌아다녀보면 한층 심해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새로 지어지거나 제 있던 자리를 떠나 이리저리 옮겨 앉았기 때문이다.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에 의해서,그리고 경순왕 4년(930)에는 천묵대사에 의해서 한 차례씩 중창을 거친 직지사는 이곳에 머물렀던 능여대사가 고려 태조에게 도움을 준 보답으로 태조 19년(936) 그 사세를 크게 키우게 된다.
신라 경덕왕 4년(927) 견훤이 서라벌을 함락하고 경애왕을 살해하자 이를 구하러 갔던 왕건은 오히려 팔공산싸움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퇴각하고 있었다.직지사 근처에 당도한 왕건은 직지사에 사람을 보내 묘책을 물었다.능여대사는 하룻밤 사이에 삼은 짚신 2천 켤례를 왕건에게 전하며 말띠 해가 되면 큰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예언했다.그 짚신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왕건은 그의 도움으로 곤경에서 벗어났고 예언대로 말때 해 934년부터 후백제을 제압하기 시작해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한다.
고려시대에 줄곧 큰 사세를 유지하던 직지사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초기에는 정종의 태를 묻은 태봉이 대웅전의 뒷봉우리에 모셔지는 인연으로 그럭저럭 예전의 규모를 지탱해나갔지만 임진왜란은 이 유서 깊은 절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더욱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던 사명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찰이라는 이유로 왜병들의 혹독한 보복을 받았다.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목탑을 비롯한 40동의 건물이 불타고 전해져오던 모든 유물들이 유실되었으며 오직 일주문.사천왕문.비로전만이 남은 폐허로 변했다.그뒤 여러 차례 손을 보아 사세를 회복해가던 이 절은 조선의 국운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으며 최근까지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1960년대 이래 옛 사격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30년도 넘은 불사를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다.
직지사의 이러한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너른 대웅전 마당에 좌우로 솟은 쌍탑이다.이 두 탑은 본디 쌍탑도 아니었을 뿐더러 태어난 고향도 직지사가 아니다.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 모양이 같은 탑 셋이 넘어진 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이것을 1974년 직지사에 옮겨와 대웅전 앞마당에 2기,비로전 앞에 1기씩 나누어 세웠다.대개의 유물은 제자리를 떠나면 그 의미와가치를 상당히 잃게 된다.그러니 관심 있는 이들은 이 탑의 이전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지역민들이나 해당 지역 관공서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옮겨진 탑이니 저간의 사정과 직지사측의 노력을 짐작할 만하다.
그래 그런지 이 탑들은 제 고향의 탑들과 닮아 있다.다른 부분은 신라시대 석탑과 대동소이한데,기단만은 일반적인 신라 석탑과는 달리 단층이다.이런 형식이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과 봉암사 삼층석탑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니 그 지방 탑들에 나타나는 특색의 하나였던 듯하다.본래 세 개의 탑이 나란히 있었던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같은 예를 보령 성주사터 정도에서 볼 수 있겠는데 그 배경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려진 바 없다.
대부분의 지붕돌 모서리와 상륜부는 옮겨진 두 손을 본 것이다.상륜부는 실상사 삼층석탑의 그것을 참고한 것이겠는데 몸체에 비해 다소 무겁고 화려하다는 인상을 준다.위로 솟는 느낌이 강한 반면 아래를 든든히 받쳐주는 느낌은 적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대웅전 앞 동서 쌍탑은 보물 제606호이고,비로전 앞 삼층석탑은 보물 제607호이다.
쌍탑을 거느리고 묵중하게 들어선 대웅전은 직지사가 고찰임을 내보이는 거의 유일한 건물이자 모두들 커지고 넓어진 절 안에서도 여전히 위풍을 잃지 않고 있는 법당이다.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점은 없어도 지대석 위에 검박하게 다듬은 넓은 면석을 세운 뒤 그 위에 갑석을 올린 축대도 구수하고,장자살과 빗살로 꾸민 문짝들도 무난하여 오히려 부담이 없는 건물이다.한 가지 악센트가 있다면 지붕 끝 수막새를 고정시키느라 못구멍을 가리기 위해 올려놓은 연봉이겠다.무슨 잘 생긴 소라껍대기를 나란히 엎어놓은 것 같아 정답다.
임진왜란이 지난 선조 35년(1602)에 새로 지은 집으로 영조 11년(173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집이다.직지사를 찾은 이라면 반드시 법당 안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법당을 새로 지을 때 쯤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벽화들이나 조각이 속하지 �은 수미단도 눈여겨볼 만하고,삼존불 뒤에 길게 걸린 후불탱화는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고라도 음미할 만하다.
대웅전이 이 절의 상징적 중심공간이라면 실질적 중심공간은 비로전이다.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법회와 행사가 이루어지고 기도하는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고려 태조 때 처음 세워져 임진왜란의 피해를 면했던 이 법당은 그러나 1976년 원래의 옛 건물을 서쪽으로 옮겨 조사전으로 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 옛맛을 잃어 버렸다.천좌의 불상을 안치했다.이 천불상은 고려 초 능여대사가 비로전을 지을 때 속리산의 경잠스님을 시켜 만들었다고 전한다.법당 하나 가득 앉아 있는 불상들 속에 고추를 내놓은 탄생불이 가운데 서 있다.법당에 들어설 때 이 불상을 가장 먼저 보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져 비죽이 웃음을 물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나 온 하늘을 안 듯 큰 합장을 하는 아낙네를 심심찮게 대할 수 있는 것도 이 법당 앞이다.천불상을 안치한 까닭에 천불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1996년 3월에 문을 연 성보박물관도 빠뜨려서는 안될 곳이다.경내의 한가운데쯤에 자리한 ㄱ자 건물 청풍료를 개조하여 만든 이 박물관에는 직지사의 유물뿐만 아니라 직지사가 관할하는 말사에 전해지던 유물들까지 함께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을 나와 마당을 돌아들면 직지사에 있는 또 다른 석탑을 볼 수 있다.원래 선산의 낙동강변 원동이란 마을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선산군청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안된 삼층석탑은 옮겨온 사연도 그렇거니와 그 생김새도 문경에서 옮겨온 세 탑과 거의 같다.하지만 세 탑보다는 훨씬 안정감이 있고 균형도 잡혀 있어 조형적으로 이 탑이 한층 우수하다.역시 상륜부는 다시 만들어 올렸고,지붕돌 모서리나 기단부도 군데군데 수리하거나 보충하였다.보물 제1186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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