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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운달산 김용사(雲達山 金龍寺).경북 문경 본문

☆~ 절집.절터/경 북

문경 운달산 김용사(雲達山 金龍寺).경북 문경

푸른새벽* 2006. 5. 4. 23:26

 




 







 

 




 







 




 

 




 







 

 




 




 







 




 




 




 

 




 

 운달산 김용사(雲達山 金龍寺)

 

경북 문경시 산북면 김용리
 
신라 진평왕 10년(588) 운달산(1097m)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금선대라는 암자에 운달조사가 창건한 운봉사가 그 전신이다

전해 내려 온 괘불의 화기에 보면,1703년 곧 18세기 초까지도 운보앗로 불렸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김룡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민간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김장자(長子:부자)가 국법을 어기고 용추 부근에서 숨어 살다가

참회와 속죄의 기도를 드리던 중에 용추에 살던 용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용이라고 하고 가운이 부유해지니 동네 이름을 김룡리라고 하였으며절 이름마저 김룡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초창 때부터의 일은 전하는 것이 많지 않고 임진왜란 때에 거의 불타 17세기 후반부터 다시 당우를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경북 북부 일대의 45말사를 거느렸으나

이제는 직지사가 본사가 되어 그 말사로 있는 조촐한 절이었는데

1997년 12월 말에 큰 불이 나서 절집은 물론,주변의 송림까지 타버려 아늑함을 잃었다

 

입구에서는 호랑이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하도 못나서 절로 웃음을 짓게 하는,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 둘이 반겨준다

일주문을 지나 인왕문을 거치면서부터는 길이 ㄱ자로 꺾여 절집 전체는 남향을 하고 있다

절집이 앉은 자리는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인 '와우(臥牛)'형으로

입구의 계곡 가장자리에서부터 빙 둘러 돌담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물빛조차 우윳빛이 난다는 이야기까지있다

산자락에 지어진 만큼 경사진 대지여서 전각들은 자연히 층을 이루며 앉아 있는데 그것이 또한 자연스런 질서를 만들고 있다

누각 옆으로 비껴 들어가게 되는 대웅전 공간 동쪽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가 몇 채 있다

그 뒤쪽으로 차례로 향하당.금륜전.극락전.상선원.응진전이 있으며 요사 구역을 지나 좀 떨어져서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은 인조 27년(1649)에 설참대사가 조성한 건물로 목조석가여래와 약사여래,아미타여래 삼존을 모시고 있다

내부 단청이 아주 화려한데 특히 천장에는 온갖 악기를 연주하는 주아기천상의 자태가 퍽 곱다

이 건물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의 기단 앞에 양쪽으로 벌려 선 지주는 괘불을 내걸 때 받치는 괘불지주이다

여기 걸리는 괘불은 높이가 거의 10m에 가까운 큰 그림이다

숙종 29년(1703)에 그려졌다고 적혀 있는 이 괘불은 중앙이 거의 꽉차도록 주존불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양옆으로 협시보살과 사천왕이 둘러싸고 있고 바깥쪽으로는 10대 제자.인왕.팔부중상이 줄을 선 듯한 모습으로 둘러서 있다

본존불의 비중이 매우 크며 보살이나 천왕들이 상대적으로 작은 것은 다른 괘불들에 견주어 독특한 편이다

또 대개 녹색 바탕에 홍색으로 그려지는 것과는 달리 청색을 많이 사용하여 매우 맑은 느낌을 준다

보살들의 화관이나 영락장식은 조선 후기의 모습이라고 해도 아주 화려한 편이다

시주자와 조성연대도 분명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아늑한 대웅전 마당에는 노주석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노주석은 부처의 불법을 밝히는 석등과는 달리 마당에 불을 피워 올려놓는 댓돌이다

꽃무늬가 새겨진 노주석 옆쪽으로는 간기가 몇 자 있다

서쪽 노주석에는 '昭和 十五年 庚辰'이라 새겨져 있는데 '소화'는 일제강점기 때 쓰던 연호로 1940년이다

동쪽 노주석에는 '五十一年 壬辰 五月'이라 새겨져 있어 서로 세운 연대가 다르다

이 임진년으느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데 그 아래로 화주와 편수(片手),

시주한 사람과 일한 사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연대가 1727년 봄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때는 영조 3년으로 지원대사가 회전문을,성정대사가 홍하문을 건립했다고 하니

기단 또한 그때 크게 개축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본다

대웅전 옆에는 기와와 흙으로 쌓아올린 큰 굴뚝이 있다

그 기와만 모아도 큰 집 한 채의 지붕을 덮을 만큼 장대하다

그보다는 작아도 비슷하게 생긴 굴뚝이 둘 더 있다

 

명부전이 특히 따로 모셔져 있는데 ,이 절은 지장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시왕상들은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반가부좌에 손을 들어 말하는 듯한 모습 등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런 상들은, 절의 오랜 창건 연혁뿐 아니라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많은 사람과

생생하게 호흡을 함께 해온 절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