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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강원 원주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강원 원주

푸른새벽* 2006. 10. 28. 23:45

 






 

 






 






 











 

 











 

 






 






 











 

 






 






 






 

원주 흥법사지(興法寺址)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전등산(傳燈山) 기슭에 흥법사(興法寺)의 옛터가 자리한다. 옛날 매우 큰 사찰이 있었을 이 흥법사지 일대는 대부분 경작지로 바뀌어 있다.


창건을 비롯한 역사 또한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현존 유물에 의존하여 신라말에 창건되었고, 940년(태조 23)에 진공(眞空) 대사 충담(忠湛) 스님의 탑과 비를 세웠으며, 조선 초기 이후 폐사가 되었다는 사실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된 절터에는 보물 제464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463호 진공대사탑비귀부 및 이수, 석축, 문지(門址)와 초석들이 산재되어 있다.


또한 보물 제365호 진공대사탑과 탑비의 신석(身石)은 1931년에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뜰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뜰에는 흥법사지에서 옮겨왔다고 하나 그 사실이 입증되지 않고 있는 국보 제104호의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이 있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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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춧돌 두엇이 맨몸으로 드러나 있고 中門을 떠받쳤을 축대가 밭두둑이 되어 버린 그 곳,거침없는 햇살을 피해 느티나무 그늘로 한 발 물러나 앉은 탓인가 건등산 아래 절터가 한눈에 들어왔다.군데군데 지붕돌이 깨진 채 삐뚤삐뚤 솟은 탑은 무성한 풀들 사이에 무뚝뚝한 모습으로 서 있고

당우가 있었을 법한 곳의 쓰러져 가는 폐가 풍경까지 더하니 그 스산함은 애잔하기 이를 데 없었다.나무에 기대어 고개를 외로 젖힌 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 그것은 오히려 폐사지에서 조우하기를 기대하며 그리워하던 장면이었으니 나의 탐닉은 간단없이 이어졌다.때로 몇 걸음 움직이면 피폐하며 거친 정경은 간데없고 불현듯 雅趣 마쳐 느껴지기도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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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법사터는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다만 「고려사절요」 '태조 신성대왕 23년' 조에서 "가을 7월에 왕사 충담(忠湛)이 죽으니 원주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왕이 친히 비문을 지었다" 라고 했으니 태조 23년인 940년에 이미 흥법사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건 연대를 신라 말로 올려 잡아도 무난하지 싶다.폐찰이 된 시기 또한 분명하지 않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폐찰이 된 후 조선 숙종 19년인 1693년에 절터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관설(觀雪)허후(1588!1661)를 모신 도천서원(陶川書院)이 들어섰으나
대원군 당시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졌다.


절터에는 보물 1463호인 진공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으며 보물 464호인 삼층 석탑이 있다.


한편,중앙박물관 뜰에 있는 국보 104호인 염거화상탑이 본디 이 곳에 있었다고 전해진다.844년에 만들어진 그것은 팔각원당형의 석조 부도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지만 진전사의 도의 국사에게서 선법을 이은 염거의 부도가 어떻게 흥법사에 있었는지는 의아한 일이다.다만 그것을 반출하려던 일본인이 흥법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진술한 것을 토대로 흥법사에 있었을 것이려니 추정하는 것이다.그렇기에 그를 두고 '전(傳)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이라고 하는 것이다.더욱 의아한 것은 고려나 조선을 통해 흥법사를 찾았던 선비들의 글에 염거화상탑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진공대사 충담(869~940)은 신라 귀족 가문 출신이며 진성여왕 3년인 889년,지금의 광주인 무주(武州)의 영신사(靈神寺)에서 비구계를 받은 후
법상종(法相宗)과 율장(律藏)을 공부했다 .


그 후 당나라에 가서 법을 구하고 918년 6월에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으며 흥법선원 또한 그의 힘으로 일군 것이다.


940년 7월 18일 이른 아침 좌탈 입망한 그를 위해 세운 탑비의 글은 태조 왕건이 지었으나 글씨는 당 태종이 짓고 왕희지가 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의 글씨를 집자했다고 한다 .


그 때문에 뭇 선비들이 다투어 비석을 보러 흥법사를 찾았으며 결국 탁본의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여 깨트리고 말았다.그 시기는 1480년 이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흥법사는 "건등산에 있다 절에 비가 있는데 고려 태조가 친히 그 글을 짓고 최광윤에게 명령하여 당 태종의 글씨를 모아서 모사하여 새겼다"라고 했으니 적어도 책이 간행 될 무렵에는 비가 온전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 조선 전기의 문신인 사가정(四佳亭)서거정(1420~1488)이 한때 흥법사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가 임지로 가는 민정(閔貞)을 전송하는 시의 첫머리에 말하기를 "치악산 속의 글 읽던 절,젊을 때 노닐던 지난 때의 일 역력히 기억나네.법천사(法泉寺)의 뜰 아래서는 탑에 시를 써 놓았고,흥법사의 대(臺)앞에서는 먹으로 비를 탁본 하였지" 라고 했으니 아직 그 시대에는 비석이 멀쩡했던 듯하다.


그 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삼촌이기도 한 송재(松齋)이우(1469~`517)가 흥법사를 찾았을 때는 비석은 이미 동강이 나고 말았던 것 같다.그는 1506년 중종 반정이 일어난 후 당시의 공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으며 그 무렵 관동 일대를 유람하며 「관동행록(關東行錄)」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그 문집에 실린 '원주흥법사비(原州興法寺碑)'를 보아도 그렇고 조선 후기의 문신인 동주(東洲)이민구(1589~1670)가 남긴 '흥법사비가(興法寺碑歌)'를 보면 그가 찾았을 때인 숭정(崇禎)8년,곧 1635년 가을에는 이미 비가 두 동강이 나고 난 다음이었다.둘 모두 이르기를 비석은 원주의 관아로 옮겨졌는데 그 까닭은 한 관리가 탁본을 하다가 비석이 넘어져 깨어진 때문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나라 안에 있던 금석문을 모아 펴낸 책인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지은 오경석(1831~1879)은 그보다 더 험한 꼴을 보았다.
그가 1856년 흥법사를 찾았을 때는 폐사가 된 절터의 풀숲 사이에 불상과 경들이 있었고 이곳 저곳 찾아다니다가 비석의 귀부와 이수를 보았는데 이수의 전액은 이끼에 덮여 그것을 떼어 내고야 볼 수 있었다고 한다.비석은 원주의 동헌인 학성관(鶴城館)에서 두 조각을 봤으며 또 다른 작은 조각하나는 백성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해 마멸이 심했다고 전한다.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