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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양양 선림원지(禪林園址).강원 양양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양양 선림원지(禪林園址).강원 양양

푸른새벽* 2006. 11. 10. 00:17

























































 

선림원지(禪林園址).

 

강원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에는 선림원지(禪林院址)가 있다.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선림원지는 현재 강원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선림원(禪林院)은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1985년 7월부터 1986년 8월에 걸쳐 이 사찰을 발굴한 결과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광복 직후 출토된 신라범종의 명문(銘文)에는 해인사를 창건했던 순응법사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이 사찰의 종이 만들어진 804년경에 해인사 등 화엄종 계통에서 창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발굴시 출토된 초창기 때의 기와들은 이 절이 9세기초에 창건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 사찰이 획기적인 변모를 겪게 된 것은 9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홍각선사(弘覺禪師)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한 다음 사찰의 성격을 화엄종에서 선종으로 전향한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삼층석탑, 부도, 석등, 귀부는 물론 발굴 때 대량출토된 기와들이 대부분 9세기 후반의 것이어서 이 때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창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태풍과 대홍수로 산이 무너져내려 금당 ( 조사당등 중요건물들을 덮어버렸기 때문에 폐사가 된 뒤 다시는 복원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발굴 당시 각종 기와들이 고스란히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사찰의 가람배치를 살펴보면 3층석탑 뒤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금당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 금당지의 주춧돌은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오른쪽에 금당과 잇대어 또하나의 건물지가 있다. 서쪽 언덕 위에는 석등이 있고 석등 북쪽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옆에 홍각선사탑비 및 귀부가 남아 있어 조사당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현재의 넓은 광장에는 승방 등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보물 제444호인 선림원지삼층석탑과 보물 제 445호인 선림원지석등, 보물 제446호인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 보물 제447호인 선림원지 부도가 있으며, 절터 전체는 강원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 절터에서는 8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은동불입상(金銀銅佛立像)과 금동풍탁(金銅風鐸), 납석제 소탑, 귀면와(鬼面瓦), 암막새기와 수막새기와가 출토되었으며, 현재에도 토기의 파편등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이 절에 있었던 신라범종은 그 양식이 독특하여 우리나라 범종의 연구에 빠뜨릴 수 없는 귀중한 문화재였으나, 6․ 25때 녹아서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잔편만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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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素)는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흰 빛을 이야기하고 박(樸)은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통나무를 말하는 것이니
노자(老子)가 이야기한 '소박'은 모든 꾸밈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아예 꾸밈이 더해지지 않은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일컫는다

아! 나는 정녕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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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터(禪林園址)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터는 화엄과 선종이 만나는 곳이다.804년 교종과 선을 오갔던 순응 화상이 종을 만드는 데 참여했는가 하면 우리나라 선종의 조종(祖宗)이라 불리는 도의 선사에게서 선법을 이어받은 염거화상이나 보조 체징 그리고 873년에 절집을 다시 일으켜 세운 홍각 선사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그로 미루어 초기 선종이 화엄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지금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 석탑과,석등,그리고 홍각 선사의 부도라 짐작되는 부도탑이 남아 있으며 홍각 선사의 탑비는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삼층 석탑 뒤로는 금당 터가,석등 뒤에는 조사당 터의 주춧돌이 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절터를 보면 선림원은 아래 계곡 쪽으로는 축대를 쌓고 위로는 비탈진 절사면을 깎아 만든 산지 가람이다.또 법계를 중시하는 선종의 영향으로 선종 사찰에 어김없이 짓던 영당 혹은 조사당 터가 석등 뒤에 남아 있어 선종 사찰의 건축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양양의 진전사터와 산청의 단속사 터와 마찬가지로 초기 선종 사찰들이 모두 경주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다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기득권을 가진 화엄이 배척하였기 때문이었다. 선림원 터가 미천골 깊은 곳에 자리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