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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강원 양양 본문

☆~ 절집.절터/강 원

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강원 양양

푸른새벽* 2006. 11. 15. 01:13







































 

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

 

강원 양양군 현내면 둔전리

 

진전사지(陳田寺址)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번지 일대 설악산(雪嶽山)에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강원도 시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전사(陳田寺)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효시가 되었던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초조(初祖)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의스님은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로 가서 지장선사(地藏禪師)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여 설법하였으나, 사람들이 교종만을 숭상하던 때였으므로 선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곳 설악산으로 들어와서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으며, 그의 선법은 제자 염거(廉居)선사와 손상좌 체징(體澄)선사에 의하여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 중기의 일연(一然)스님이 1219년(고종6) 이 절로 출가하여 장로(長老)였던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 이후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구전에 의하면, 고려말 불교가 타락일로에 빠지고 조정 백관의 부정과 방탕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자연 변방에는 도둑떼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설악산 권금성을 거점으로 한 도둑떼들이 진전사와 신흥사를 여러 차례 약탈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결국 도둑들의 노략질과 횡포에 견디지 못한 승려들이 절을 떠남으로써 폐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삼층석탑1기와 보물 제 439호로 지정된 진전사지부도가 있으며, 절터는 ‘양양진전사지’라는 명칭으로 강원도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정영호(鄭永鎬) 선생의 주도 아래 1968년 4월 석탑과 부도를 해체 복원하기 전 까지만 하여도 석탑은 도괴 직전의 상태에 있었고, 부도는 도괴되어 부재들이 흩어져있었다고 한다.


1989년 6월 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펴낸 <진전사지발굴보고>에는 탑과 부도의 도궤된 경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1910년대 말의 가을철에 이곳으로 온 일본인 2명이 먼저 지렛대로 석탑의 옥개석을 받쳐 놓고 1층의 사리공(舍利孔)내에서 다량의 보물을 훔쳐내었으며, 부도 또한 보물을 탐색하기 위해 탑신부에서 기단부에 이르기까지 지렛대로 완전히 도괴시켰다고 한다.


이 땅의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왜적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보물을 강제로 취합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 분명히 새겨 놓아야 한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

 

 

도의 선사(道義禪師)는

마조도일의 선법을 이어받은 서당지장(西堂智藏.709~788)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선종을 소개한 인물이다

 

스승 마조는 서당으로 부터 자신의 심법이 해동의 신라로 까지 번져나가 세상을 크게 일으키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당으로 부터 마조의 선법을 전해 받은 신라승 도의는 북한군(北漢郡)태생으로 속성은 왕(王)씨 였다.출생 연월일은 분명치 않으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처음 법명을 명적(明寂)이라 하였다

 

도의는 신라 선덕왕 5년(784년)에 사신 김양공(金讓恭)을 따라 뱃길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그는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에게 기도드린 후 다시 조계산으로 찾아가 6조 혜능스님의 탑에 세 번 예배를 드렸다.이때 혜능 스님의 탑이 저절로 열렸다가 그가 예배를 마치자 저절로 닫혀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강서의 개원사(開元寺)를 찾아가 스승 마조의 뒤를 이어 개당하고 있던 서당 지장 화상을 친견한다.이어 서당은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고 한다."진실로 가위 법을 전하려면 이 사람을 빼놓고 또 다른 누구에게 법을 전할 것인가"

 

그리고 나서 서당은 친히 '명적'이라는 법호를 '도의'로 고쳐준 후 그에게 법을 인가하여 주었음은 물론이다.서당에게서 법을 받은 신라승 도의는 두타행(頭陀行)을 하면서 행각에 나서 마침내 백장산(百丈山)으로 또 다른 마조의 으뜸 제자인 회해(懷海)를 찾아 간다.도의를 만난 회해는 서로 법거량을 나누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강서의 선맥(禪脈)이 이제 모두 동국(東國)의 중으로 돌아가고 있구나"강서는 마조 도일의 본거지.그러므로 마조선은 이로부터 그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어 지류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 새로운 물줄기는 바로 동국,즉 신라인 것이다.

 

이렇듯 마조 도일 선사의 수제자들인 서당,백장 두 종사(宗師)의 문을 두드려 법을 얻은 신라승 도의 선사는 이로부터 37년 간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오후수행(悟後修行)에 힘쓰다가 마침내 헌덕왕 13년(821년) 신라로 귀국한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는 도의 선사에게 실로 냉정 하였다.마치 달마 조사가 동쪽으로 와서 양의 무제(武帝)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신라는 경교(經敎)만을 존중하고 탑이나 절을 짓는 불사에만 매달려 있었을 뿐 선에 대해서는 전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허황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연(時緣)이 이르지 못함을 알게 된 도의는 마치 달마가 숭산의 소림사에 머무르며 면벽하듯 설악산 동쪽에 진전사(陳田寺)란 조그만 암자를 짓고 벽을 향해 해가 지도록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였다.

 

그러나 도의 스님이 당나라에서 서당 지장으로부터 마조선의 심법을 전해 받고 왔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 마침내 신라의 서울 경주 황룡사의 승통(僧統)지원(智遠)화상이 설악산으로 도의 스님을 찾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승통이라 하면 전체의 불교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고승

그는 도의 선사를 찾아가 그가 소중히 여기고 있던 교외별전(敎外別傳)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화엄의 4종 법계(法界) 이외에 따로 또 무슨 법계가 있으며 53선 지식이 행포(行布)한 법문 이외에 다시 무슨 법문이 있습니까.다시 말씀드리건대 이교(二敎) 이외에 따로이 조사의 선도(禪道)가 있다고 이르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도의 선사에게 승통 지원이 물었던 이 질문은 심오한 뜻을 나타내 보이고 있음이다.

 

당시 통일신라의 불교는 철저히 화엄사상에 젖어 있었다.신라에 있어 불교는 단순히 종교로서가 아니라 호국(護國)의 이념으로까지 승화되었다.특히 한동안 피었다가 시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청정하고 올바른,공덕의 꽃으로 장엄한 불국토(佛國土)를 장식한다는 화엄사상은 신라의 정신이 되어 마침내 소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철학이 되었다.

 

불교는 이미 신라에 있어 전세(前世)의 종교였으며 신라는 전세에 있어 이미 부처가 설법하였던 정토라는 화엄사상은 신라인들에게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통일신라에 있어 불교는 화엄사상 이상도,그 이하도 아니었다.도의 선사에게 승통 지원이 화상이 물었던 그 질문은 바로 그러한 뜻을 내포하고 있음인 것이다.

 

화엄사상은 전우주를 네 가지로 관찰하여 이를 4종 법계라 하였다.즉 우주 만물이 낱낱이 개별성이 있는 사법계(事法界) 우주만유의 근본에 일관된 본체,곧 평등한 세계인 이법계(理法界) 위의 두 법계처럼 낱낱이 독립된 것이 아니고 사상(事象)이 우주의 본체라고 보는 이사무애법계 사법계와 이법계가 서로 융통하여 평등하다고 보는 사사무애법계의 4종이 우주의 근본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한 화엄경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있어 문수보살의 법문을 들은 이 동자는 마침내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간절한 구도의 행각을 벌이게 되는데 이 동자가 만나는 53인의 선지식 중에는 뱃사공,이교도,심지어 매춘부와 같은 여인도 있어 인생의 역정(歷程)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원 화상의 질문은 이러한 뜻일 것이다.

 

"화엄사상의 네 가지 법계 이외에 또 무슨 법계가 따로 있으며 선재 동자가 만난 53인의 그 선지식 이외에 또 다른 무슨 선지식이 있는 것입니까.

도의 스님이 마조로부터 받은 심법은 그 네 가지 법계 이외의 어떤 법계를 가리키고 있으며 또 다른 새로운 선지식이 있다는 것입니까"

 

이에 도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승통께서는 이제 4종 법계를 이야기하였지만 조사들의 심법에서는 곧바로 정리당체(正理當體)를 들고 있으니 이는 바른 이치에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또한 승통께서는 선재 동자가 만난 53인의 선지식 중 가장 마지막에 만난 문수보현,미륵의 보살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조사심법(祖師心法)에서는 이들의 상(相)이 보일지도 않을 뿐 아니라 53인이 행포한 법문은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물거품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그러므로 일찍이 당나라의 귀종(歸宗)화상은'그 모든 장교(藏敎)들은 도대체 무엇을 밝힌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다만 가만히 주먹을 세워들어 보였을 뿐입니다".

 

이에 지원 승통이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그러한 심법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도의 화상은 다만 마조가 일찍이 설하였던 그 유명한 말 한마디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이다.

 

"얻으려고도 말고,생각지도 말고,닦으려고도 하지 마시오.부처님이 형상을 나투신 것은 이 정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편신(方便身)을 빌려 나투신 것입니다.비록 여러 해 경전을 읽고 전하였을지라도 이 심인법(心印法)을 증득(證得)하려면 겁(劫)을 다 하더라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지원 승통은 도의 선사에게 무릎을 꿇어 스승의 예로 절을 드린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스님으로부터 장엄한 부처의 교훈을 들어 감사합니다"

 

승통에게 행한 도의 선사의 짤막한 선답(禪答)은 마조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이란 법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조는 다음과 같이 시중하였었다."진정으로 법을 구하는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있지 않으며 부처를 떠나 따로 있는 마음도 없다.(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 선(善)을 취하려 하지 말라.악(惡)을 버리려 하지도 말라.깨끗함과 더러움, 그 어느 것도 믿어 의지하지 말라.죄의 본질은 텅 비었다.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쉬지 않고 오가는 번뇌의 고리도 끊어져 버린다.번뇌라는 것도 고정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이러한 까닭에 일체의 세계는 오로지 마음 뿐이며 모든 현상은 결국 일법(一法)이라는 도장으로 모양지어 찍어낸 도장 자국(所印)인 셈이다" *최인호 지음 '길없는 길'중에서*

 

도의 선사는 당나라에서 37년,진전사에서 40년 동안 선정에 들었다가 입적했다.

 

그를 두고 선종을 이 땅에 퍼뜨린 조종(祖宗)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그 보다 먼저 선법을 전한 인물들은 따로 있었다.다만 그들의 애씀은 짙은 향기의 큰 꽃으로  피어나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지누 지음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