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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勤政殿).서울 경복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근정전(勤政殿).서울 경복궁

푸른새벽* 2006. 11. 15. 23:44

 

 

 

 

 

 

 

 

 

 

 

 

 

 

 

 

 

근정전(勤政殿)

 

광화문을 들어서면 흥례문이 복원되어 있고,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을 들어서면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勤政殿)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조선 왕조의 위엄을 상징하는 ,모든 궁궐 전각 중이 으뜸이다.현재의 건물은 역시 고종 시절 중건한 것이며 개국 당시의 창건 건물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행각을 단랑에서 복랑으로 바꾸고 월대를 세로 만드는 등 변화를 주었다

 

월대는 건물 앞뒤와 좌우 모두 상하 이중으로 형성하였으며 그 위에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 돌난대로 구성한 돌난간을 세웠다.계단과 만나는 부분과 모서리 부분에 세운 각 엄지기둥에는 4신상(四神像)과 12지신상 등을 조각하여 방위에 맞게 배치함으로써 상징적으로 정전을 수호하게 하였다.건물 앞 뒤면에 하나씩,그리고 건물 좌우에 각각 두 개씩의 돌계단을 상하월대에 설치했는데 앞쪽 계단 가운데는 답도(踏道)를 놓아 구름속에 노니는 봉황을 새겼다

 

초석(礎石)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바깥기둥은 시각적인 교정,즉 양쪽 끝의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아래로 쳐져 보이는 착시현상을 막기 위해 귀솟음 및 안쏠림 기법으로 처리하였다.건물 네 면의 바깥 기둥 사이에는 벽체없이 사분합 또는 세 짝,두 짝 창호를 달았는데 모두 솟을 빗꽃살 무늬로 화려하에 장식하였다.창호 위에는 정자살 교창을 설치하였다
다포계 양식의 공포대 구성은 외삼출목 내사출목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 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을 두었다.창방과 평방 위치의 외부 살미(山彌)는 옆으로 약간 뻗어 휘어 오른 세 겹의 앙서(仰舌)와 그 위에 수서(垂舌)형태로 된 첨자를 올려 구성하였다.바깥쪽에는 새들이 깃들이지 못하도록 부시를 덮었다

 

아래위층을 시원하게 틔운 통판 구조인 건물 내부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깔았다.내부의 가구(架構)를 살펴보면 안두리기둥 외에도 다른 전각들에서는 보기 힘든 귀고주를 두었다.위층은 아래층 툇보와 내목도리 및 멍에 창방을 짜맞춘 곳 위에 위층 평주를 놓고 아래층과 똑같은 공포를 짜올렸다

 

건물 뒷면 가운데 칸 안두리기둥 사이에 사람 한 길 가까운 높이의 단을 놓아 보좌(寶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용상(龍床)을 설치하였다.용상의 뒤에는 일월오악병풍(日月五岳屛風)을 배경으로 하여 네 마리의 용머리를 정교하게 조각한 삼절병(三折屛)을 두었다

 

근정전의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지붕의 각 마루에는 양성을 하여 용마루의 양 끝에는 취두를,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세종 20년과 성종 5년의 기록에는 근정전에 청기와를 올렸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이전의 근정전은 청기와 지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근정문에서 근정전으로 이르는 어로의 좌측에는 정1품에서 정9품에 이르기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을 각각 12개씩 배열하였으며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있다.그리고 건물 앞면 모서리 부분에는 청동으로 만든 정(鼎)을 배치하였으며 하월대 동서쪽 계단 옆에는 드므를 배치하였다

 

경복궁 창건 당시 정도전이 근정전이라는 이름을 지을때 그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천하(天下)의 일은 부지런히 해야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쇠약해지고 무너져 버리는 것이 필연적 이치입니다.작은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큰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아침에 정치를 보살피고 낮에 방문(訪問)하고 저녁에 수령(修令)하고 밤에 몸을 편히 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이는 임금된 이로서 지켜야 할 부지런함입니다.이러한 뜻에서 신(臣)이 바라옵건데 정전을 근정전이라 하기를 말씀 드립니다"

 

이곳 근정전에서는 정종.세종.단종.세조.성종.중종.명종.선조 등 여덟분의 임금이 등극하였다

 

『궁궐지(宮闕志)』에서는 근정전을 '조하(朝賀-신하가 입궐하여 임금께 하례 드림)을 받는 정전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경복궁 창건 당시를 기록한 『태조실록(太祖實錄)』에도 '수조지소(受朝之所)로 설명하고 있다.이렇듯 근정전은 국가적 의식을 비롯하여 조회를 치르던 곳이다

 

흔히들 요즘의 정부 또는 내각에 상응하는 조선시대의 기구를 '조정(朝廷)'이라고 한다.그 사전적 의미는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의논 또는 집행하던 곳'이다.그렇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바로 각 궁궐의 정전이다.더 임밀하게는 정전의 앞마당이 조정이란 말의 어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근정전을 받치고 있는 상하중층 월대에는 건물의 전후좌우 면마다 계단을 설치하였다. 상하 각각 앞면(남쪽)과 뒷면(북쪽)에 하나씩,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둘씩이다. 그 중 앞면의 계단은 근정문에서 향하는 어로와 이어져 세 부분으로 구획된다
가운데 부분 양쪽으로 서수(瑞獸)를 배치하여 어계(御階)를 형성하고 그 한가운데 답도(踏道)가 있다.좌우의 계단과는 달리 커다란 장방형 돌이 비스듬히 박혀 있는 것이다.답도는 말뜻 그대로는 '밟는 길'이지만 실은 어가(御駕)를 탄 임금이 그 위로 지나다니는 길이다

 

1867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중건되었던 경복궁의 중심이자 조선왕조의 법전(法殿) 근정전이 136년 만에 전면 보수되었다

 

 

 

 *서행각에서 바라본 서쪽 측면

아래층 양쪽 끝 칸에는 머름 위에 세 짝씩의 창호를 달았고 가운데 세 칸에는 머름 없이 두 짝씩의 창호를 달았다. 팔작 지붕의 합각면은 장식을 하지 않고 박공으로만 마감했으며 양성을 올린 지붕마루에는 취두와 용두,잡상을 장식하였다.경회루가 잡상이 11개인 데 비해 근정전의 잡상은 7개 씩이다

 

 

 

 

 

 

 

 *정(鼎)인가 향로(香爐)인가

조선시대의 궁궐 정전 중에서도 이곳 근정전과 경운궁 중화전에서만 청동으로 만들어 설치한 이 시설물을 두고 향로라고도 하고 정이라고도 한다.조상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일이 주목적인 종묘의 정전에도 영녕전에도 붙박이 향로는 없다.창덕궁의 인정전이나 창경궁 명정전,경희궁 숭정전에는 없는 이 청동제 시설물을 유독 근정전과 중화전에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복궁은 조선 왕조를 개국한 법궁이요,경운궁은 대한제국 시대를 연 법궁이다 .

 

고대 중국에서는 왕권의 상징으로 정이 사용되었다.그리고 백성들이 하늘의 복을 받아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기도 했다.하나라에서 은나라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바뀔 때 마다 정도 함께 전해졌다.그래서 정을 두고 '전국(傳國)의 의기(儀器)'라고 했다.이 시설물이 향로가 아니라 정이라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근정전과 중화전에만 정이 설치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드므

하월대 양쪽 측면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계단 옆에 각각 하나씩 배치하였다.드므에는 주술적으로나마 화재를 예방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램이 담겨 있다

 

 

 

 *상하 월대 정면 돌계단

근정전은 이중 월대를 높직이 새워 자리를 잡았다.상하 월대의 가장자리를 따라 하엽동자로 받친 팔각 돌난대를 둘러 돌난간을 설치했으며 각 모서리 및 난간과 계단이 만나는 엄지기둥에는 어김없이 돌짐승을 배치했다.『궁궐지』에서는 엄지기둥을 문로주라 하였으며 그 돌머리에 각각 열두 방위에 응하는 동물 형상을 새겨 놓았다고 하였다.모든 궁궐의 월대 중 돌난간을 두른 곳은 이곳 뿐이다

 

 

 

 

 *조정의 박석과 차일 고리

근정전 마당의 박석은 종묘의 박석과 함께 가장 자연스럽다.화강석을 손으로 거칠게 가공한 옛것 그대로이기 때문이다.이러한 박석은 햇빛의 반사를 막는가 하면 미끄럼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쇠로 만든 둥근 고리는 근정전 외진주 바깥쪽의 고리와 어울려 차일을 칠 때 사용하던 것이다

 

 

 

 *서쪽 측면의 돌계단과 돌난간

근정전으로 오르는 상하 월대에는 모두 12개의 계단이 설치되었다.즉 상하 월대에 각각 정면과 뒷면에 하나씩,그리고 양 측면에 두 개씩이다

 

 

 

 *품계석

어로를 벗어난 동서 양옆으로 조정에는 조그마한 비석 모양의 표석이 각각 12개씩 모두 24개가 서 있다.조정의 질서를 확연하게 구분해주는 품계석이다.근정문 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하월대 가까이까지 정9품.정8품.정7품.정6품.정5품.정4품.종3품. 정3품.종2품.정2품.종1품.정1품의 순으로 배열되었다 

 

 

 

 *근정전 답도에 새긴 봉황

한 쌍의 봉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경운궁 중화전을 제외한 모든 궁궐 정전의 답도에는 봉황을 새겼다..예로부터 봉황이 날면 성군이 덕치가 펼쳐짐으로써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였다

 

 

 

 

 *쌍서수(雙瑞獸)

상하월대의 동남,서남쪽 모서리에 각각 한 쌍씩 모두 네 쌍이 배치되었다.각 쌍마다 새끼를 한 마리씩 품고 있는데 세 쌍에는 옆구리에서,한 쌍에서는 가슴에서 활개를 편 채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다.또한 각 쌍 모두 두 마리의 시선이 어긋나 있는데 한결같이 한 마리는 근정전 처마 쪽을,다른 한마리는 근정문이 있는 남행각 쪽을 바라보고 있다.영조 연간에 저술된 「춘성유기」에서는"...그 동남쪽 모퉁이에 돌개 암수 한 쌍이 있는데 암컷이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무학대사의 말에 따라 동남 방향에서 오는 바깥 도둑을 지키도록 저렇게 조각 해놓았다고 한다. 개가 늙으면 그 새끼가 대를 이어 지키도록 새끼까지 곁들여 새겼다"고 한다

 

 

 

 *근정전의 어좌(御座)

건물 뒷면 쪽으로 안두리기둥 사이에 사람 한 길 남짓한 단을 쌓아 어좌를 마련하고 그 위에 용상을 설치하였다.용상은 물론 용상 뒤의 삼절병에도 네 마리의 용머리를 정교하게 조각했으며 그 뒤에 다시 일월오악병풍을 쳤다.그리고 용상 위에는 닫집을 가구 하였다

 

 

 

 

 *쌍룡회주(근정전 천정)

두마리 황룡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이는 곧 용의 승천을 의미한다용의 승천은 또한 지극히 상서로운 일이요,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함을 상징한다.일반적으로 용의 발톱 수는 그 용의 격을 나타낸다.대체로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을 오조룡이라 하여 황제나 왕을 상징한다.아주 드물게 일곱 발톱을 가진 칠조룡은 격이 매우 높은 황제를 상징한다. 그런데  근정전의 이 용은 분명 일곱 발톱을 가졌다

 

 

 

 

 *근정전의 고주와 가구

내진 고주는 바깥 두리기둥에서 툇보로 연결했으며 이 툇보와 뜬방창사이의 둘레에는 당초문을 그린 낙양을 달았으며 뜬방창 위에는 머름을 두고 운궁을 장식하였다.건물 내부에는 18세기 후반의 정아조회지도에 맞추어 168점의 각종 의장을 배치하였다

 

 

 

 *사정문(思正門)

근정전 뒷면 기단 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근정전에서 편전인 사정전으로 드는 문이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두리기둥을 세우고초익공을 짰다.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경복궁근정전(景福宮勤政殿)


국보 제223호 
서울 종로구 세종로 1-1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근정전은 조선 중기 이후 세련미를 잃어가던 수법을 가다듬어 완성시킨 왕궁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궁궐건축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