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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경기 양주 본문

☆~ 절집.절터/경 기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경기 양주

푸른새벽* 2006. 12. 31. 00:01

 

 






 











 






 

 











 

 











 

 











 

 











 

 






 






 






 






 






 











 

 






 











 

 






 






 






 






 






 






 






  

회암사터(檜巖寺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경기 양주. 연이은 바위봉과 울창한 소나무숲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며 빈 절터를 감싸고 있는 천보산 자락 역사의 거친 회오리를 겪고 폐허 속에 침몰해버린 회암사터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양주 회암사는 늦어도 11세기 후반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추측되지만 1998년 부터 조사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1만여 평에 이를 정도로 사역이 크게 확장된 것은 고려 말 나옹선사의 중창에서 비롯되었다.고려 말 문인이었던 이색(李穡)은 중창된 회암사의 모습을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이 기록에 따르면 건물은 모두 262칸이었고,4.5m정도의 큰 불상 7구에 관음상의 높이가 3m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가람이었다.


나옹은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의 제자라고 전한다.지공은 1326년 고려를 방문하여 2~3년간 체류하면서 고려 불교계의 큰 스승이 되었는데 인도에서 공부했던 아란타사(阿蘭陀寺)를 그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여겼다.지공이 연경(燕京)에 유학 온 나옹을 만나 회암사가 위치한 지형이 아란타사와 흡사하다고 전하였다.이에 고려에 귀환한 나옹은 1370년 무렵 회암사 주지로 부임하였고 스승의 뜻을 받들어 대대적 중창불사를 일으켜 1376년에 낙성 기념 문수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억불(抑佛)시대인 조선 전기에도 회암사는 왕실의 지원을 받는 대가람이었다.태조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이자 나옹의 계승자인 무학(無學.1327~1405)왕사가 조선조 초대 회암사 주지를 지낸다.당시 회암사는 행궁에 버금가는 대우와 후원을 받았고,세종대에는 승려 250명에 대지가 1만여 평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하였다.성종조인 1475년 무렵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중창되었고,현존하는 석단과 기단석들은 이 때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명종의 섭정인 문정왕후가 후원한 보우(普雨.1515~1563)는 회암사를 무대로 불교 중흥을 꾀하였으나문정왕후의 임종과 함께 처형되면서 사운(寺運)도 쇠하게 된다.1595년 『선조실록』에 "회암사는 불에 타 옛터만 남았다" 고 했으니 1566년과 1595년 사이 어느 때인가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려 말 조선 초를 풍미했던 3대 고승인 지공,나옹,무학의 부도가 회암사터 뒷산 능선에 줄이어 남아 있어 이 절의 높았던 사격(寺格)을 말해주고 있다.


천보산 기슭,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한 경사에 자리잡은 사역은 8개의 단지로 구성되고 각 단지는 축대에 의해 구획되었다.발굴 결과에 따라 편의상 가장 아래쪽을 1단지라 하고,가장 뒤 위쪽을 8단지라고 하는데 본격적인 건물터가 발굴된 곳은 3단지부터이며,4~5단지 동편 숲인 전단림은 아직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1,2단지는 절의 진입부로 넓은 빈 터에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3단지는 절의 대문과 향적전(香積殿).종루.관음전.욕실 등이 있던 곳이며 4단지는 정문과 서료,동료,서객실,동객실, 미타전과 긴 창고 등이 빼곡히 들어섰던 곳이다.5단지는 주불전인 보광전의 앞마당에 해당되는데,정문터와 함께 정료대,석등좌대,집수구 등의 석물 흔적이 출토되었다.정문 양 옆으로 동랑과 열중료가 길게 연결되어 중심 불전지구의 경계를 형성하였는데 열중료는 두 건물이 하나로 연결된 듯 보이는 특이한 건물이다.안마당 양쪽으로 서파침과 서운집,동파침과 동운집이 있었고, 건물들 주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보광전이 있는 6단지는 중심 불전지구에 해당한다.주불전인 보광전은 24.9X21m의 규모로 정방형에 가까운 정면 7칸의 중층 건물이었다.보광전 앞에는 6.2m에 달하는 넓은 월대가 놓여졌고,월대를 포함하여 사방에 납석을 깔아 비 오는 날에도 통행이 가능하였다.이는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시설이다.


서쪽 서승당은 E자형 구들 시설 두 개가 남북으로 마주보게 놓여졌는데 보통 구들과는 달리 지면보다 높게 설치된 침상식 구들이다.또한 보광전 동쪽에는 두 개의 중정을 가진 日자형 건물터가 발굴되었는데 이색의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은 건물이어서 후대에 중창된 승방 건물로 추정 된다.보광전 뒤 7단지는 가장 조밀하게 건물들이 들어선 지역이다.중앙의 설법전 좌우로 영당과 조사전이 놓이고 그 주위에 서기료,입실료,수좌료,시자료 등 승려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승방들이 촘촘히 배열되었다.모든 승방에는 구들을 설치하였고,왕을 호위하는 신하들처럼 강당인 설법전을 에워싸고 있다.


가장 뒤쪽의 8단지는 중앙에 정청과 동.서 방장이 놓였다.중앙 정청에는 마루를 설치하였고,양 옆의 방장들은 방고래가 열 줄이나 되는 온돌시설이었다.이 세 건물은 서로 연결되었고,중앙 정청의 폭이 양 옆 건물보다 넓다.마치 지방 도시의 객사와 같은 모습의 이 건물군은 왕실의 행차 때 쓰였던 곳으로 추정되며 행궁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건물군 좌우로는 나한전과 대장전이,정청 바로 앞에는 직각 방향으로 사리전이 놓였다.
사리전의 위치난 방향 역시 일반 사찰에서는 이례적이며,정청을 보호하고 통행하기 위한 건물로 추정된다.이 지역에서는 청기와 파편,봉황과 용이 새겨진 막새기와,드므에 해당하는 청동기,토수(吐首)와 잡상 같은 지붕 장식물들이 출토되었는데,모두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궁궐적 성격을 가진 회암사에는 또 다른 건축사적 의의가 있다.남북으로 겹쳐진 각 단지의 남단에는 동서로 긴 건물들이 들어서서,마치 행랑과 같이 각 단지들을 명확하게 경계 짓는 독특한 배치를 하고 있다.고려 중기 이전의 고대 가람들은 회랑을 둘러 중심 영역을 형성했지만,조선조의 가람들은 동서남북 사방에 4동의 건물을 배열하여 중심곽을 이루면서,회랑이 사라졌다.회암사 역시 회랑은 없지만,동서로 긴 행랑으로 가가 영역을 형성하고 있어 고대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가람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김봉렬 지음 '불교건축'중에서*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를 비롯하여, 지공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49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제50호)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51호)·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제52호)·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82호)·맷돌(경기도민속자료 제1호)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