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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경기 여주 본문

☆~ 절집.절터/경 기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경기 여주

푸른새벽* 2007. 1. 10. 00:46

 






 

 











 

 






 






 











 

 











 

 






 






 






 






 






 






 











 

 











 

 






 

고달사터(高達寺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경기 여주 북내면 쪽 이정표를 따라가다 상교리에 들어서면 거대한 둥치의 나무가 마을의 신목(神木)처럼 서 있고 고만고만한 논밭들과
편편하고 너른 야산까지의 혜목산(慧目山)고달사터(高達寺址)가 나온다.시원하게 트인 앞면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야트막한 산봉들로 폭 싸여 수행터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음을 짐작케한다.


도(道)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고달사(高達寺).이 절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엔 사방 30리가 모두 절땅이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도량에 넘쳤다는데 오늘날은 절터마저 한갓진 곳에 자리잡고 있어 고달사터를 아는 이조차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긴 석불대좌(보물 제 8호),비교적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 7호) 가 있다.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국보 제 4호로 지정된 부도를 볼 때 그 옛날 찬란했던 역사의 현장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보게 된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절터에선 아직 그 당시의 기왓장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다만 이때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이고,남한강의 수로지 배후에 거대한 사원을 건축했다는 설과 맞아떨어져 신라시대 창건의 가능성이 짙다.고려시대 원종대사(元宗大師.868~958)창건설도 있으나 원종대사 이전에 절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렸다.경남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는 29년간 이곳 고달사에 주석한 고승 원감국사 현욱의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였다.진경대사는 원종대사 찬유에게 법통을 잇게 하니 원종대사는 고달선원의 제 3대 정신적 지주가 된다.


고려 태조 이후 광종대까지 역대 왕실의 돈독한 귀의를 받은 원종국사가 고달사 주지로 머물면서 전국 제일의 선찰로 면모를 갖추었다고 전한다
여초(麗初)의 선종이 전성기를 이룰 때는 마침 지방호족들이 한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는 전환기였고 선종과 지방호족은 정신적,정치적 재편작업으로 연대가 가능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고 난 뒤 언제 어떻게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다만 풍수지리 형국상 오래 유지될 절은 아니었다고 한다.고달사의 암자인 듯 "취암사(鷲巖寺)와 상원사(上院寺)가 혜목산에 있다"고『신증동국여지승람』「여주목 불자조(佛子條)」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 두 절 역시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오늘날의 고달사터 대부분은 논과 밭,농가의 터전으로 변해 있다.절터의 석물도 또하나 논밭과 마을집의 석축으로 쓰여진 듯 남아있는 것이 별로없다.마을 도랑 위에 반듯하게 깎은 화강암 돌다리나 빨랫돌은 얼른 보아도 사찰건축에 쓰였던 석조물임에 틀림없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