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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경기 파주 본문

☆~ 풍경소리/경 기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경기 파주

푸른새벽* 2006. 12. 31. 23:54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광주산맥의 곁가지를 타고 뻗어온 용들이 한양을 만들고 그 꼬리가 머물러 있는 고장을 광탄면 용미리(龍尾里)라 했단다


북으로 가는 길목의 용미리를 지나다보면 동쪽 산 기슭 소나무숲 사이로 잘생긴 석불 2구가 우뚝 솟아 있다
근년에 지은 아담한 용암사 왼편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먼 데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우람하고 거대한 석불이 있다
왼쪽 석불은 둥근 모자를 썼고,오른쪽 석불은 네모난 모자를 썼는데 그 크기와 위용이 일단 압도적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크고 중량감이 느껴지는 두 석불은 거대한 천연암벽을 다듬어 마애각법으로 몸을 조성하고
그 위에 목과 머리.갓을 제가끔 따로 조성해 올린 특이한 불상인데 이는 안동 제비원의 불상 조성양식과 비슷하다
천연석을 이용한 탓에 신체 각 부위의 비례가 잘 맞지 않아 다소 기형적인 측면도 있지만
워낙 거대한 체구의 당당한 불상이어서 보는 사람을 압도해버리는 힘이 있다
얼굴 아랫부분 너비가 17.4m,얼굴 길이가 2.45m나 된다


석불을 자세히 뜯어보면
어딘지 친근하고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둥근 모자 석불은 자연적인 미소가 깃들인 네모진 얼굴이 인상적이고,이목구비를 큼직하게 새겼으나 생동감은 부족하다
삼도가 없는 둥근 목이지만 뒤로 제친 듯한 어깨가 당당하다
오른손은 가슴께에 얹고 왼손은 어깨 앞에서 긴 줄기의 연꽃을 쥐고 있었으나
왼손 위의 연꽃은 구리 등으로 만들었는지 그만 떨어져 나가고 없다


양 어깨를 감싼 통견의 법의는 계단식으로 세로무늬를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는 U자 모양을 선각하고,가슴께에 보이는 큼직한 띠매듭은 장식적 효과를 준다
오른쪽 불상은 합장하고 있는 모습만 다를 뿐 세부의 조각수법과 조성양식이 오른쪽 불상과 거의 비슷하다
턱을 앞으로 당겨 좀 우직해보이는 면이 있다
둘러친 철책을 따라 석불 뒤로 올라가보면 어깨선이 한결 육중하고 근엄해보여 멈칫 서게 된다


이 석불은 벽제관을 지나 고양과 파주를 경계짓는 혜음령을 넘어 개성으로 뻗어가는 정로(正路)이면서
가장 중요한 길목에 서 있어 이 고장 최대의 수호신이나 다름없었다


오른쪽 불상 아랫부분 옆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예로 꼽히고 있다
보물 제 93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파주용미리석불입상(坡州龍尾里石佛立像)


보물 제93호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