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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養和堂).서울 창경궁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양화당(養和堂).서울 창경궁

푸른새벽* 2007. 2. 6. 12:37

 

양화당(養和堂)


통명전의 동쪽으로 나란히 위치한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초익공 양식의 팔작 지붕 건물이다
남향으로 앉았으며,기단은 2중으로 형성하였다
통명전 월대 아래 동쪽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기단 위 안쪽으로 다시 세벌대 장대석으로 높은 기단을 쌓았다
이 안쪽 기단과 연결된 한벌대 기단은 서쪽으로 통명전 기단과 맞물린다
바깥쪽 기단 남쪽과 동쪽에는 돌계단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안쪽 기단 위에 너모꼴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며,지붕 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여 추두와 용두,잡상을 배치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끼웠다
특이하게도 잡상은 단 하나씩만을 장식하였다
건물 앞면 가운데 툇간 2칸을 개방하였는데 각 칸으로 오르는 돌계단과 디딤돌을 놓았다
개방한 툇간의 좌우 각각 2칸씩은 창호를 달고 좁은 퇴를 내달아 평난간을 둘렀다
건물 정면과 측면에는 띠살 창호를 두 짝 혹은 네 짝씩 달았으며,교창은 달지 않았다
건물 양 측면의 뒤쪽 툇간 마름 위는 창호를 달지 않고 벽체로 마감하였으며
뒷면 가운데 2칸은 앞면과 마찬가지로 개방된 툇간을 형성하였다
건물 내부는 전후 좌우의 툇간과 대청 및 온돌방으로 구성 되었다
양화당 내부 역시 오랫동안 트인 공간에 마루만 깔려 있었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
툇간 부분의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그 안쪽 대청 및 온돌방 부분은 우물천장이다


양화당의 북쪽 뒤 언덕은 통명전 건물 뒤 화계와 길게 이어져 있고
화계 앞에는 연가(煙家)를 얹은 굴뚝 2기가 높직하게 서 있다
건물 동쪽으로는 언덕을 오르는 계단 아래에 비교적 평평하고 널찍한 바위가 박혀 있고
그 바위 표면에는 군데군데 기둥을 세운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宮闕志』에서는 이곳 양화당에서 명종이 독서당(讀書堂)의 문신(文臣)들을 친히 시험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남한산성에 몽진했던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환도하면서 이곳에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철종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가 고종 15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양화당은 성종 15년(1484)의 창경궁 창건 당시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8년(1616)에 중건되었다
그러나,인조 2년에 발생했던 이괄의 난 때 다시 불에 탔으며 그 복구는 인조 11년(1633)에 이루어졌다
이때의 공사 내역을 자세히 기록한 『昌慶宮修理所儀軌』에 의하면 인경궁의 무일당(無逸堂)을 헐어서 옮겨 지었다
이후, 순조 30년의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다가 순조 34년(1834)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화당 편액의 글씨는 순조 어필(御筆)인 것을 전해온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창경궁 내전의 편액들은 건물의 규모에 비해 무척 큰 편이다

양화당의 편액 역시 순조의 어필(御筆)이다

 

 *양화당 앞면에는 장마루를 깔아 좁은 퇴를 내달고 평난간을 둘렀다

 

 *양화당 뒤 굴뚝과 화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