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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서울 종로 본문

☆~ 바람소리/궁궐(宮闕)

종묘(宗廟).서울 종로

푸른새벽* 2007. 2. 7. 22:44

 

 

 

 

 

 

 

 

 

 

 

 

 

 

 

 

 

 

종묘(宗廟)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그리고 추존왕 및 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이 종묘(宗廟)이다
그 중심 건물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며,기타 부속 건물로 구성되었다
종묘는 원래 정전을 이르는 말이었으며 태묘(太廟)라고도 했다
종묘를 도성에 배치한 원칙은 고대 중국의 도성 제도에 근거하고 있다
주(周)나라 왕실의 관직과 공업 행정 및 영선(營繕)제도를 기록한
『周禮』「冬官考工記(동관고공기)에 '종묘는 도성 내 왼편인 동쪽,사직은 오른편인 서쪽에 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周禮』의 배치 원칙에 따라,조선시대 한성의 종묘는 정궁인 경복궁의 왼쪽 즉,동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반대 방향인 서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이 배치되었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8월에 그 지을 터를 살폈고,9월에 감방(坎方.정북 방향)의 산(창덕궁 뒤의 응봉)을 주맥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한다는 뜻으로 남향을 일컬음)한 종묘 터를 확정하였다
그해 12월에 짓기 시작하여 다음해(1395) 9월에 완공이 되어,개성에서 추존 4대의 신주를 옮겨 모셨다
완공 당시에는 정전(신문.동문.서문 포함)과 공신당(功臣堂),신주(神廚),향관청(享官廳).재궁(齋宮)이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완공 이후 태조는 종묘 남쪽에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허(虛)한 곳을 보완하였으며
태종은 재궁을 지었다(재궁은 창건 당시에도 5칸으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의 기록이 개수인지
증축인지 아니면 처음 짓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태종은 종묘 남쪽의 가산(假山)을 중축하였으며,정전의 동서 행랑을 지었고,
창건 당시 정전 담장 밖에 있던 공신당을 담장 안 동쪽 계단 아래로 옮겨지었다
종묘 남쪽 가산 밖으로 담을 둘러 쌓은 때도 태종 시절이었으며,
종묘에 북문(北門)을 만들어 창덕궁 동남 협문으로 통하게 한 것도 태종 때의 일이다
그리고,세종 3년(1421)에는 정전 바깥 서쪽 방향에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을 지어 그곳에 신주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그 뒤 150여 년 동안은 별다른 증.개축이 없다가 명종 원년(1546) 신실(神室)부족 문제가 대두됨으로써 정전이 증축되었다
종묘 역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며,광해군 즉위년(1608)에 중건하였다
그 후 현종.영조.헌종 시대 등의 몇 차례 개수와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묘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등 49위의 신주를 모시고 있으며
영녕전에는 16위의 왕(의민황태자 즉 영친왕 포함)과 18위의 왕후 등 모두 34위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시고 있으나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정전과 영녕전 어디에도 봉안되어 있지 않다


중세 동양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종묘는
지난 1995년 12월,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던 UNESCO 세계유산 위원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록되었다
종묘는 국보 제 227호이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문화재청자료*

 

 *외대문

창엽문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기단이 높았고 앞면 가운데 계단이 있었다

 

 * 외대문에서 북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

거칠고 널찍한 돌을 깔아 가운데를 약간 볼록하게 형성하였다

가운데가 신향로(神香路)이며,

이를 중심으로 동쪽이 어로(御路),서쪽이 세자로(世子路)이다

신향로는 정전 신문을 통하고 어로와 세자로는 어숙실로 이어진다

 

 *외대문 밖 하마비

태종 13년에 예조의 건으로 하마비를 세웠다고 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하마비는 현종 4년(1663)에 세운 것이다

높이 132cm,너비58cm, 두께 20cm의 비석에 '至此大小人員下馬碑'라고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