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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전북 익산 본문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
탑의 높이는 8.5m이고 기단 면석에는 두 탱주를 갖추었다
1층 몸돌은 우주를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의 돌로 네 모서리를 세우고
탱주를 새긴 네 장의 중간 면석을 짜맞춰 만들었다
2층은 4면 1석씩,3층 이상은 2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를 조각하였다
3단의 층급받침을 지붕과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하고,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으며
지붕돌의 경사는 완만하고 네 귀가 약간 들려 있다
탑의 생김새나 여러 가지 이유로 백제탑.신라탑.고려탑이라고 하는 등 견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지명을 따라 왕궁리탑이라고만 불린다
보물 제 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선 첫인상으로 보면 이 탑은 백제탑의 인상을 짙게 풍긴다
단층기단과 얇고 넓은 지붕돌 등 전체적 이미지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탑신의 체감률이 적은 데서 오는 굳건한 느낌과, 그에 비해 기단이 좁은 데서 오는 가녀린 느낌,
지붕돌 모서리의 상쾌한 들림에서 오는 경쾌함 등 대립적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아름다운 백제탑의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미륵사탑이나 정림사탑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백제타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의 기법에서
신라 석탑의 양식이 보이므로 통일신라 초기의 탑으로 보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옛 백제의 지역에서 이어져오던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 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견해가 있다
1965년에 기울어짐을 바로잡기 위해 시행된 해체.복원 공사중,
1층 지붕돌과 기단부에서 양식상 고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 사리함과 사리병,
19매의 금판에 새겨진 금강경,청동여래입상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유물들은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1965년의 발굴 결과 이 탑의 기초가 백제 시대의 유적위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세번째 주장은
"견훤의 도읍인 완산(전주)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도선이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써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고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고 하는
『금마지(金馬志)』의 기록과도 부합한다
실제로 고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새 국가의 앞날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도선의 의견에 따라 전국 각처에 풍수지리설에 따른 비보(裨補)를 했다
그러나 근래의 발굴 과정에서
상부대관(上部大官).관궁사(官宮寺).궁사(宮寺) 등의 명문이 적힌 기와들이 나와
이곳에 백제의 궁궐이 있었고,그 내부에 대관사.관궁사.궁사라 불리던 절이 있었으며
오층탑은 이 절의 유물이라는 추측도 다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애초부터 고려 초기의 탑인지,아니면 백제 때 조성된 것을 고려 시대에 보수했는지,
아직은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1997년에 국보 제 289호로 지정되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익산왕궁리5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
국보 제289호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문화재청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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