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부석사 선묘각과 부석(浮石寺 善妙閣.浮石).경북 영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부석사 선묘각과 부석(浮石寺 善妙閣.浮石).경북 영주

푸른새벽* 2007. 3. 2. 23:50

 

 

 

 

부석사 선묘각과 부석(浮石寺 善妙閣.浮石)


부석사 무량수전의 동쪽 뒤편으로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는 한 칸짜리 조그마한 전각이 있는데
바로 선묘각(善妙閣)이다
이 선묘각은 의상을 사모하여 몸바쳐 그를 도운 당나라 아가씨 선묘(善妙)의 넋을 기려
근래에 세운 것이다


선묘는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등주에 이르렀을 때 묵은 신도 집의 딸이었다
37세의 훤칠한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가에 귀의하여
그가 뜻을 펼치는 일을 도우리라고 결심했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떠나는 배를 타던 날,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묘가 부더에 나아갔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이에 선묘는 의상에게 주려고 마련한 옷가지가 든 상자를 바다에 던지며
"이 상자를 저 배에 닿게 해달라"고 서원하니 상자가 물길을 따라 배에 가 닿았다
뒤이어
"이 몸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뱃길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며 몸을 바다에 던지니
소원대로 선묘는 용으로 변하여 의상이 무사히 신라땅에 닿을 수 있도록 호위하였다


선묘의 이적은 부석사에 터를 잡을 때에 또 한번 일어나게 된다
의상이 태백산 자락인 이곳을 점찍었으나
이미 '500의 이단의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묘는 이번에는 사방 십 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하였고
이에 두려움에 떤 무리들이 물러나 마침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묘용이 변해서 떴던 돌이 지금 무량수전 서쪽 뒤에 있는 돌무더기라고 하는데
뒷날 누가 새겼는지 '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택리지』에서 이곳의 뛰어난 자리를 논한 18세기의 학자 이중환이 1723년에 와서 보고는
"실을 넣어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막힌 데가 없으니 정말 신기하다"는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뜬 돌인지 아닌지 하는 과학적 결과가 그리 중요한 것이랴
다만 의상이 이미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 집단과의 갈등이 퍽 심각했고
의상이 그 세력을 강력한 힘으로 물리쳤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다


선묘용은 그 뒤 다시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불상 밑에 머리를 두고 석등에 꼬리를 드리우고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일제강점기에 무량수전을 수리할 때 마당을 발굴해보니
땅에 묻힌 석룡이 임진왜란 때 칼에 맞아 허리가 끊어진 채로 드러났다는 얘기도 있다
그때 부석사에서는 석룡을 보수하겠다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 안된다며 옥신각신했다고 하는데
정작 어찌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사진으로 전하는 것도 없거니와 그 또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노릇은 아닐 터이다
그토록 의상의 뒤를 받쳐주는 신심이 있었다는 것,
또한 그런 선묘설화를 널리 유포시킬 만큼 의상에 관한 신비화와 절대화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또한 의상의 영향력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석사에는 선묘의 이름을 붙인 우물인 선묘정도 있으나
지금은 유물각 뒤쪽에 거의 손닿을 수 없도록 파묻혀 있는 형세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