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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경북 영주 본문

☆~ 풍경소리/경 북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경북 영주

푸른새벽* 2007. 3. 3. 23:59

 

 

 

 

 

 

 

 

 

 

 

 

 

 

 

 

 

 

 

 

 

 

 

 

 

 

 

 

 

 

 

 

 

(조선고적도보자료)↗

 

부석사 조사당(浮石寺 祖師堂)


국보 제 19호인 조사당은 말 그대로 그 절의 조사스님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니,바로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의상을 부석사에서 모시게 된 것은 언제부터의 일일까? 절을 창건했거나 종파를 연 고승을 모시는 조사신앙은 사실 의상이 펼치려던 화엄이나 원융의 세계와는 좀 다르게 선종에서 하는 신앙방식이다.깨달음이 곧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선종은 우리나라에서는 9산으로 분파하며 각 산문의 개산조의 부도를 세워 기리고는 했으니 그것은 선종이 도입되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9세기의 일이었다.그러므로 이 부석사의 조사당도 선종이 풍미하던 9세기 이후에야 세워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의상의 부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조사당은 의상이 초창하고 수도하던 자리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 있는 조사당은,해체.수리시 발견한 묵서명에서 밝혀졌듯이 1366년에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다시 세운 것이다.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작은 전각이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맞배지붕이 엄숙성을 주어 조사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정면의 가운데칸에는 문이 있지만 양옆으로는 바람과 빛이 드나드는 살창이 나 있다.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집인데,무량수전의 공포가 마무리 선이 매우 부드러운 데 비해 조사당의 그것은 무뚝뚝하게 툭툭 끊어진 듯한 형상이다.건축적으로는 계열이 다르다고도 하는데,무량수전이 온갖 공력을 들인 당대의 대표적인 건물이라면
조사당은 비교적 평범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게다가 최근에 보수하면서 부재를 많이 갈아끼운 탓에 옛 맛이 많이 줄어들었다


내부에는 의상대사상을 모시고 일대기를 그린 탱화를 걸었는데 다 20세기 들어서 조성된 것들이다.바닥에는 고려 때처럼 전돌이 깔려 있다.벽에는 본디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그려져 있었으니,천계를 수호하는 이 천왕들을 조사당 벽에 그렸던 것은 그만큼 의상을 모시는 지성이 극진했다는 뜻이겠다.이 고려시대의 벽화는 조사당을 해체.수리할 때에 벽채로 떼어서 보관하였다가 지금은 유물전시각에 진열해놓았다


조사당 동쪽 창 밑에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仙扉花)라고 전한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국보 제19호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