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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덕주산성(德周山城).충북 제천 본문

☆~ 풍경소리/충 북

제천 덕주산성(德周山城).충북 제천

푸른새벽* 2007. 3. 5. 00:16

 

 

 

 

 

 

 

 

 

 

 

 

 

 

 

 

 

 


덕주산성(德周山城)


월악산 산마루와 줄기를 두른 석축산성이다
월악산 남쪽 자락 일대는 충주에서 소백산맥 너머 문경으로,
나라의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길목으로서 전략적.군사적 요지이다
그러므로 이 일대는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각 시대에 걸쳐 성이 축조,보수되었는데
주요 도로의 목을 쥐는 차단성의 기능을 하였다


산성의 둘레는 약 2km이며 월악산 산마루와 그 지맥을 둘러 내성과 외성을 갖추었다
덕주골로 들어서서 만나는 첫번째 성벽이 외성이고
하덕주사에서 마애불을 향해 올라가다 도중에 스쳐 지나는 성벽이 내성이다
성벽은 화강암 자연석을 대강 다듬어 2m 남짓한 높이로 쌓았으나 지금은 많이 무너졌으며
조선시대에 송계계곡을 중심으로 쌓은 남문과 북문,동문의 석축 홍예가 남아 있다


우선 남문은 송계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망폭대 건너 산기슭에 남아 있다
덕주산성의 세 문 가운데 가장 웅장한 이 성문은
송계계곡의 동쪽을 끼고 있는 암벽과 서쪽의 산줄기를 연결하여 막은 차단성이다
근래 목조문루를 다시 만들고 높이 1.7m 가량의 석축 홍예,잇닿은 성벽 등을 손질하였다
안팎으로 벽을 쌓고 그 위에 통로를 만드는 식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남문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연결되다가 끊겼고 서쪽으로는 산꼭대기까지 연결되어 있다


덕주사로 들어가다가 길이 성벽을 끊고 지나가는 지점에서 계곡 건너편을 보면 동문이 있다
이 문은 덕주산성 내성의 정문 구실을 했는데 1980년 수해로 문에 이어진 성벽이 무너진 것을
근래에 다시 복원하였다
계곡 이쪽과 저쪽에서
역시 지형에 따라 충단을 이루거나 능선을 기어올라 산꼭대기로 연결되는 성벽을 볼 수 있다


북문은 한수 면소재지가 있는 송계리 새터마을 민가들 근처에 있다


덕주산성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처의 덕주사와 마찬가지로
덕주산성도 신라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가 피난하여 머물던 곳이라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조선 고종 때는 명성왕후가 이곳에 월악궁이라는 별궁을 마련한 적이 있는데
송계초등학교 안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월악궁은 고종 29년(1892)부터 3년에 걸쳐 각 도의 대목을 동원하여 지었으나
갑오농민전쟁 이후 일본군이 들어오고 그후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시해되면서 자연히 혁파되었다
월악궁의 부재들은 1920년 한수보통학교 교사 건축에 쓰이는 등 대부분 흔적 없이 흩어졌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제천덕주산성(堤川德周山城)


시도기념물 제35호(제천시)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외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