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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원풍리마애불좌상(院豊里磨崖佛坐像).충북 괴산 본문

☆~ 풍경소리/충 북

괴산 원풍리마애불좌상(院豊里磨崖佛坐像).충북 괴산

푸른새벽* 2007. 3. 9. 00:11

 

 

 

 

 

 

 

 

 

 

 

 

 

 

 

 

 
괴산원풍리마애불좌상(槐山院豊里磨崖佛坐像)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병좌상(竝坐像)이다
12세기 무렵 조성된 고려시대 마애불이며 보물 제97호이다


원풍리마애불좌상은 연풍 면소재지에서 수안보 쪽을 향하다가 찻길 가 왼쪽 기슭에 있다
찻길 오른쪽에는 수십 명이 앉아서 쉴 만한 너럭바위들이 들어앉은 계곡이 이어져 있어
지금과 같이 큰길이 뚫리기 전이라면 마애불들은 그 멋진 계곡을 굽어보며 앉았을 것이다


높이 12m쯤 되는 큰 바위벼랑 위쪽에 가로 세로 4mm 남짓한 감실을 파고
그 안에 거의 꽉차게 두 불상을 새겨넣었다
머리 부분은 비교적 높게 돋을새김하였으나 그 아래로는 점차 새김이 얕아졌고
팔꿈ㅊ 아래,무릎 부분은 대부분 떨어져나갔다
바라보는 방향은 바위벼랑이 앉은 방향을 따라 동북쪽을 향했다


두 불상은 규모와 표정,표현이 거의 같다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에 눈이 가늘고 길며 코는 뭉툭하다
입은 꽉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기는 한편 미소를 표현하려 했던 낌새도 미미하게 느껴진다
두 분 중에서 오른쪽 불상은 코가 떨어져나갔다
넓고 네모진 어깨와 굵은 팔이 강건한 느낌을 주지만 가슴 부분이 두께 없이 밋밋하여
그 느낌을 상쇄한다


팔꿈치 아래는 거의 벗겨져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남은 윤곽으로 보아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었고 흘러내린 옷자락이 그 위를 덮고 있다
두 어깨를 감싼 법의가 굵은 선각으로 표현되었고
불상 좌우의 좁은 공간에 보살상 같은 것이 새겨진 듯하나 불확실하다
두광이 가늘게 표현되었고 머리를 둘러 화불이 다섯 구씩 새겨졌으며
불상에는 군데군데 채색을 했던 흔적도 있다
예전에 어떤 구조물이 있었던 듯 감실 오른쪽 아래로부터 옆으로는 인공으로 뚫은 듯한 구멍들이 보인다


이 마애불의 유래에 관해서는 고려 말 나옹대사가 상암사라는 절을 짓고 몸소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근처를 지나다가
장수처럼 힘있게 생긴 이 불상들 덕분에 인근에 장사가 많이 나겠다며 불상 뒤쪽의 혈을 찌르고
불상의 코를 떼어버렸다는 전설도 있다
그외 바위와 불상 곳곳에 남아 있는 총탄 자국은 한국전쟁 때 생긴 상처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불병좌상은 중국 북위시대,특히 5~6세기에 많이 조성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물다
두 불상은 법화경 설화에 나오는 견보탑품의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괴산원풍리마애불좌상(槐山院豊里磨崖佛坐像)


보물 제97호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1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부수법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傳)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