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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전북 남원 본문

☆~ 절집.절터/전 북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전북 남원

푸른새벽* 2007. 3. 28. 23:00

 






 

 











 






 






 






 

 






 






 











 






 

 











 

 











 






 






 






 

 






 






 











 

 





 

만복사터(萬福寺址)

 

사적 제349호

전북 남원시 왕정동 489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큰 절터가 있다.덕유산에서 뻗어내린 교룡산의 줄기인 기린봉 기슭으로,산자락이 절터를 나지막하게 감싸고 앞으로는 요천이 잔잔히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다.옛날에는 남원 시가지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이 절로 들어가는 승려가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었다고 한다.바로 여기가 남원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던 만복사(萬福寺.사적 제349호)가 있던 곳이다.누구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도호부」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재위 때(1046~1083) 창건하였다" 고 하며,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
왜구에 불타버린 이래 숙종 4년(1678)남원부사였던 정동설(鄭東卨)이 중창하려 했지만 규모가 워낙 커서 예전처럼 복원하지는 못하고 승방 1동을 지어 그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이후 300여 년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서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는 등 폐사로 있다가 1979년부터 7년간 전북대박물관팀에 의해 발굴,복원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창건 후 몇 차례 중창되면서 탑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각각 금당이 들어선 1탑 3금당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이루었음을 확인했다.현재 절터에는 여러 금당터와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석불입상,석대좌,당간지주 등이 남아 화려했던 만복사의 옛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가람배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절터로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창건 당시 가람은 "동쪽에 5층 전각과 서쪽에 2층 전각이 있다" 하였는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있었던 발굴조사에서 동쪽의 5층 전각(목탑터)과 서쪽의 2층 전각(서금당터)이 확인되었다.곧 만복사는 동전서탑(東殿西塔) 양식이며,탑과 금당의 중심이 동서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같은 초창 가람과는 별도로 동.서로 금당이 목탑을 중심으로 거의 대칭되는 곳에 자리잡고,목탑과 남북 일직선상에 북금당이 자리잡은 2차 가람의 모습과 이들 금당에 각각 불상을 모신 대좌가 있었음도 발굴 결과 확인되었다.경주 불국사가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는 대웅전 영역 외에 대웅전 위쪽에 비로전 영역,대웅전 위쪽에 극락전 영역이 따로 조성돼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우선 만복사터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유물은 도로 위의 철책 속에 갇혀 있는 석인상이다.한껏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인왕상의 몸통은 땅속에 묻혀 있다.석인상 아래쪽으로 내려서서 절터에 이르면 보물 제32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절터 맨 앞쪽에 서 있다.당간지주 뒤쪽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는 중문(中門)터가 있으나 토층(土層)조사 결과 중문터는 창건 당시의 건물은 아님이 밝혀졌다.


중문터 뒤에는 창건 당시 동쪽 5층 전각,곧 목탑터가 있다.남쪽변에 각각 계단 일부가 남아 있는데 정면과 측면이 각각 5칸이며,둥글게 다듬은 초석과 지대석.기단석 등이 복원돼 있다.중문터와 목탑터의 사이에는 네모난 지대석 위에 복엽 연화문을 양각한 하대석이 남은 석등이 자리잡고 있다.상면 중앙에는 간주를 끼울 수 있는 구멍도 남아 있다.


목탑터 왼쪽의 석대좌(보물 제31호)가 있는 건물터가 창건 당시의 서쪽의 2층 전각,곧 서금당터이다.서금당터는 위둘레가 1칸이고,정면 5칸 측면 4칸 정도의 규모이다.남쪽에 계단의 일부도 남아 있다.


목탑터 뒤쪽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터가 북금당인데,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외둘레 1칸이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계단터가 남아 있다.목탑터와 북금당터 사이에는 복엽 연화문이 양각된 하대석만 남은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하대석 상면 중심에 지름 30Cm의 홈이 파였으며,그 바깥으로 팔각 구획이 있어 간주를 받치도록 되어 있다.


목탑터의 오른쪽에서 뒤쪽으로 약간 물러선 곳에 자리잡은 동금당터는 파손이 심한 편이나 남아 있는 초석과 적심석 등에 의하면 정면 3칸 측면 3칸인 건물로 추정된다.남쪽과 북쪽에 남아 있는 계단터가 희미하다.북금당터와 동금당터는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세조 9년(1463)이후 세워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금당터 뒤쪽에 오층석탑(보물 제30호)이 있으며,동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이에 석탑의 부재인 지붕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오층석탑 뒤쪽에는 석불입상(보물 제43호)이 있는 보호전각이 있고 전각 오른쪽에 건물터 둘, 전각 뒤쪽에도 작은 건물터 하나가 복원돼 있다.북금당터 뒤쪽에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강당터가 들어서 있다.


만복사는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의 무대이기도 하다.이 소설은 『춘향전』과는 달리 남자가 절개를 지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