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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東九陵).경기 구리 본문

☆~ 바람소리/조선왕릉

동구릉(東九陵).경기 구리

푸른새벽* 2007. 11. 7. 23:47

 

 

 

 

 

 

 

 

 

 

 

 

 

 

 

 

 

 

 

동구릉(東九陵)

 

경기 구리시 인창동 2-1

세계문화유산지정


조선왕조 9명의 왕과 17명의 왕비.후비가 잠들어 있는 곳이 동구릉이다
1408년 조선역사의 문을 연 태조가 건원릉에 터잡아 누우면서 조선왕조의 왕릉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여기를 동구릉이라 부른 것은 1849년 헌종의 경릉이 아홉번째로 들어서면서부터이고
그전에는 능이 늘어 나는 대로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렸다


동구릉은 전체 능역이 59만여 평에 달해 그 광활한 대지와 숲만도 장관이다
숲이 울창해 삼림욕을 즐기기에 그만이고,학생들 소풍장소로,역사공부의 현장으로도 제격이다


9릉은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建元陵),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가 묻힌 목릉(穆陵),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崇陵),제20대 경종비 단의왕후가 묻힌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元陵),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경릉(景陵),추존된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綏陵)이다


동구릉의 터는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한양 가까운 곳에 길지를 물색하던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김인귀(金仁貴)가 추천해 하륜(河崙)이 나가보고
능지로 택정했다고 전하는 한편,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에게 부탁해 자신과 후손이 함께 묻힐 적당한 택지를 정해두었다고도 전해온다


한양으로 천도해온 조선 태조는 생전에,고려 왕릉이 대개 개성 부근의 산악지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왕릉의 참배도 불편하거니와
왕릉의 수호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태조는 자신과 후손들의 유택(幽宅)을 한양 가까운 곳에 정하고자 고심했는데
어느날 망우리 고개에 올라 동구릉을 바라보니 왕릉의 군락지로 더없는 길지(吉地)더란다
짐작컨대 이때 이성계 옆에는 분명 무학대사가 있었을 법하다


동구릉을 돌아보면
사람이 만나는 인연도 묘하지만 죽어 묻히는 인연도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로 만나 죽어서도 합장에 드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쌍릉으로 곁에 묻히기도 하고,

왕과 왕비가 서로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외톨이로 묻혀 있기도 하니 말이다
살아서는 분명 투기를 벌였을 정비와 계비가 죽어서는 부왕과 왕비,계비 순서로 삼릉을 이뤄 편히 잠들어 있고
정비는 멀리두고 계비와 누워 있는 왕도 있다


동구릉은 사적 제193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