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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健元陵).경기 구리 동구릉 본문

☆~ 바람소리/조선왕릉

건원릉(健元陵).경기 구리 동구릉

푸른새벽* 2008. 4. 2. 21:49

 

 

 

 

 

 

 

 

 

 

 

 

 

 

 

 

 

 

 

 

 

 

 

 

 

 

 

 

 

 

 

 

 

 

 

 

 

 

 

 

 

 

 

 

 

 

 

 

 

 

 

 

 

 

 

 

 

 

 

 

 

 

 

 

 

 

 

 

 

 

 

 

 

 

 

 

 

 

 

 

 

 

 

 

 

 

 

 

 

 

 

 

 

건원릉(健元陵)


사적
경기도 구리시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조선 제1대 태조의 능.

건원릉(健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조선 제1대 태조의 능이다. 1408년에 양주 검암촌에 건립하였으며, 이후로 현릉 · 목릉 · 휘릉 · 숭릉 · 혜릉 · 원릉 · 경릉 · 수릉 등 8기의 능이 더 조성되면서 동구릉(東九陵)이라고 부른다. 석실을 갖추고, 병풍석을 둘렀으며, 사초를 함흥의 갈대를 심은 특색이 있다. 병풍석의 조각과 정중석의 설치, 신도비를 세운 것 등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정자각과 신도비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1408년 5월 24일,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조 이성계가 창덕궁의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터를 양주의 검암(儉巖)으로 정하고, 조묘도감제조 박자청이 공역을 시작하였다. 지하 구조인 현궁을 석실로 만들자는 의견과 회격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대립되자, 7월 26일에 세자 이제(李禔)에게 명하여 종묘에 나가 점을 쳐서 석실로 짓도록 결정하였다.

9월 7일에는 산릉의 공역이 마무리되어 9월 9일에 국장이 이루어졌다. 1409년 윤4월에 길창군 권근이 비문을 작성하고, 성석린이 글씨를 쓰고, 정구가 전액(篆額)을 써서 신도비를 세웠다.

1690년에 숙종은 비각을 세우지 않아서 신도비의 글자가 문드러졌으니, 비각을 세우라고 명하여 1691년에 완공하였다. 1764년 2월에 정자각을 수리하게 되었는데, 태조의 능이니 특별히 영조가 행차하여 알릉례를 행하고, 하룻밤 묵으며 공역을 살폈다. 1784년에는 능상의 석물과 곡장이 무너지자, 정조도 영조의 예를 본받아 직접 작헌례를 거행한 후 수리를 시작하였다.

건원릉의 지하 구조는 석실이며, 봉분에는 병풍석을 세우고 난간석을 둘렀다. 면석에는 12지신을 새겨서 방위를 나타내고, 우석에는 영저와 영탁을 세기는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인다. 사초는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심었는데, 일반적으로 산릉의 사초를 모화관의 잔디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여 특징적인 모습이다.

능상은 계체석을 3단으로 구성하였다. 상계(上階)에는 중앙에 혼유석을 두고 양쪽에 망주석을 배치하고, 중계에는 장명등을 중심에 놓고 문석인 한 쌍이 마주 보고 세워졌다. 하계의 중앙에 정중석이 놓이고 양쪽에 무석인이 마주 보고 서 있다.능상 아래에는 정전 3칸 · 배위청 2칸으로 구성된 정자각이 있는데, 18세기의 익공 형식이 잘 남아 있어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 春官通考)』에 따르면 정자각에서 홍살문까지 거리는 약 97보이며 수라청과 수직방이 있었다 하는데, 현재는 수직방만 남아 있다.

건원릉은 조선의 첫 번째 왕릉으로 석실과 회격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석실로 건립하였다. 고려 왕릉 제도를 답습한 초기 모습으로, 『 國朝五禮儀』에 기록된 석실 제도와는 다르다. 현릉 · 목릉 · 휘릉 · 숭릉 · 혜릉 · 원릉 · 경릉 · 수릉 등 8기의 능이 더 조성되면서 동구릉(東九陵) 이라고 부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건원릉(健元陵)

동구릉에 들어서서 직선거리의 맨 위쪽(북쪽) 깊숙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자리잡고 있고,그 정면 멀찍이에 홍살문을 세웠다.여기서부터는 성역이니 악귀는 아예 범접하지 말라는 표시다.오른쪽으로 묘내수가 흐른다.묘에 물이 찬다면 명당도 아니거니와 자손에게 화가 미칠 징조이다.묘내수가 얼마나 잘 빠지느냐는 그래서 중요하다.


왕이 능으로 오르는 길을 참도라 한다.홍살문에서 참도를 거쳐 직선으로 들어가면 제를 올리는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왼쪽으론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작은 석물이 놓여 있다.기단과 중대석이 갖춰져 있으며 위가 편편한 아담한 석물이다.능에서 임금이 제향 뒤 축문을 태워 묻는 망료위(望燎位,소전대라고도 부른다)로 예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자각 남쪽으론 제의 준비를 행하는 수복청이 3칸짜리 집으로 마련돼 있어 역시 태조릉이구나 싶다.애당초엔 왕릉마다 있었을 이 수복청은 현재 거의 다 사라지고,잘해야 주춧돌만 남아 그 흔적을 말해줄 뿐이기 때문이다.수복청 옆에 용무늬 비머리가 얹어진 태조의 신도비가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중국 진송 때 비롯된 신도비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대부의 묘에는 종종 신도비를 세웠지만 왕릉에 경우에는 건원릉의 태조와 헌릉의 태종 신도비가 전부인 희귀한 예이다.


건원릉은 우선 규모가 넉넉하고 앞이 시원스레 트여 대범하고 편안하면서 아늑한 위치에 들어앉아 있다.좌우를 살펴보면 아하! 명당이란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왼쪽의 청룡과 오른쪽의 백호가 등줄기를 세워 흐르고 앞산과 그 뒤 한강 너머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朝山)이 아득하며,능원 아래 정자각 좌우에는 묘내수가 모여 흐르는 시내가 있다.이런 형국을 지관들은 맹호출림형이라 부른단다.또 다른 형국으로 꼼꼼히 따져보면 장군이 천막 안에서 쉬고 있는 형국도 된다고 한다


3면의 곡장 안에 봉분을 안치했는데,봉분은 마치 더벅머리 총각처럼 억새로 덮여 있어 특이하다.유독 고향을 그리워했던 태조의 생전을 헤아려 억새가 지천인 고향 함흥땅에서 옮겨다가 마지막 옷을 입혀드렸다는 애틋한 사연이 서려 있다.그러나 이야기와는 달리 억새풀 덕분에 봉분은 여느 왕릉보다도 더 위엄 있어 보인다.


태조의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조성된 현정릉(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의 능제를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신라 왕릉의 병풍석은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고,고려왕릉의 호석(護石)제도도 그대로 이어받는다.다만 돌의 모양,조각의 흐름 등이 장인의 솜씨와 안목,실험정신에 따라 바뀌고 변형되어갈 따름이었다.


봉분 아랫부분에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을 둘렀다.석난간은 앙련으로 돌리고 금강저를 든 수호신이 새겨져 왕과 함께하고 있으며 12각 면마다 수놓아진 당초문과 구름문 조각이 화려하다.봉분 뒤 곡장 안으로는 돌로 만든 호랑이와 양이 호위하고 있고,봉분 앞에는 상석과 화려하고 장식성이 뚜렷한 8각 장명등이 놓였으며,양 옆에 망주석이 있는데 모두 정성이 극진하다.그 양 옆으로 홀을 들고 읍하고 선 문인석과 석마,장검을 빼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인석이 늠름하며 조각솜씨도 뛰어나다.능은 정남에서 약간 서향이다.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왕조 오백년의 능제(陵制)에 기준이 된다.따라서 이후의 능들은 저마다 솜씨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석물의 배치와 능제는 대부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조성돼 비슷하다.


건원릉이 내려다볼 수 있는 좌우로 8릉 16위가 15유택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큰 나무의 본줄기가 건원릉이라면 다른 능들은 본줄기에 곁가지를 치고 나가 꽃망울을 맺은 듯한 형상이라고나 할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