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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외규장각터(外奎章閣址).강화 고려궁터 본문

☆~ 풍경소리/인천광역시

외규장각터(外奎章閣址).강화 고려궁터

푸른새벽* 2008. 12. 13. 16:38

 

 

 

 

 

 

 

 

 외규장각터(外奎章閣址)


조선시대 때도 고려궁터에다 행궁을 짓고 임금이 난을 피해 머물렀다
외규장각도 행궁 안의 여러 건물들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행궁이 완전 폐허가 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이다
프랑스군은 귀중한 책들과 금은괴 등을 모두 약탈해 가고 남은 건물까지 모조리 불태웠다
강화행궁을 완전 폐허로 만들어 놓고서야 떠났다


정조 8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 의하면
외규장각은 강화도행궁의 동쪽,장녕전(長寧殿) 서쪽에 6칸의 규모로 있었다고 전한다
외규장각터는 현재 고려궁터 왼쪽 담장 밖의 강화군립도서관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본래는 행궁터 강화유수부 건물과 처마를 잇대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는 전란에 대비하여 국서(國書)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에 매우 고심하였다
그래서 춘추관.성주.전주 등지에 사고(史庫)를 마련하고 실록 등을 분산해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전주사고와 강화사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에 강화부가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전주사고의 책들을 선조 28년(1595)에 모두 강화부로 옮겨왔다
그 후 정유재란(1597) 때는 영변 보현사로,선조 36년(1603)에 다시 강화부 마니산으로 옮겨 왔으나
병자호란(1636)을 맞아 책의 일부가 수난을 겪는다
왕실의 중요 도서 피난길은 사람의 그것보다 험했다


효종은 북벌계획을 세우면서 강화도에 별고(別庫)를 설치하고
역대 임금의 유물들을 행궁이 세워졌던 현재의 고려궁터에 보관했으며
현종 원년(1659)에는 정족산성 안에 사각(史閣)을 짓고 서책을 옮겼다


숙종은 1679년 강화 바닷가에 돈대 설치 작업을 하면서 한편을론 왕실족보인 『선원록』을 편찬케 한다
그 동안 붕당세력이 비대해져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였다
숙종 21년(1695) 강화유수 김구(金構)가 행궁 동쪽에 장녕전을 세우고
숙종이 어필(御筆)과 서액(書額)을 내렸으며
이미 편찬된 『선원록』과 임금의 화상(御眞) 등을 이곳에 보관했다
정조 때에 이르러 경기.충청.황해의 삼도 수군을 통솔하는 통어영이 강화로 옮겨오면서
강화는 군사 요충지로 한층 격상되었고 사고의 안전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이어 정조 6년(1782)에는 행궁 동쪽에 외규장각을 준공하고 지금까지 강화내에 분산되어 있던 책들과
왕실의 족보.어필.어제.옥인.금보 등을 비롯해
서울 궁성으로부터 다수의 의궤.옥책(옥돌에 새긴 책)들을 옮겨왔다
이로써 외규장각으 포화상태가 될 만큼 귀한 자료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왕실관계 기록보관소로 온갖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은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를 맞아 한꺼번에 큰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은 특히 궁전과 외규장각에 관심을 갖고
옥책과 은괴 19상자를 비롯해 귀중한 보물이다 싶은 것은 죄다 배에 실어 본국으로 빼돌렸다
서책 1천여 종 6천 책 중에서 200여 종 340책을 가져가는 생생한 과정을 살펴보자
『한불관계자료』에 실린 당시 프랑스군 지휘관이었던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기록이다


"겉으로 보기에 꽤 가난해 보이는 강화읍에는 각하에게 보내드릴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간혹 거처하는 저택(행궁을 말함)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실이 있었습니다
위원회는 공들여 포장한 340권을 수집하였는데 기회가 닿는 대로 프랑스로 발송하겠습니다
무게가 대단하여 왕립 우선회사(郵船會社)로 보내 드릴 수 없음이 유감스럽습니다(중략)
본인은 규정에 따라 그 목록을 작성케 하였으며 이 신기한 수집품을 각하에게 보낼 생각인데
틀림없이 국립도서관에 전달할 만한 유익한 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져가고 남은 책들은 남김없이 불태워 없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강화부의 궁전들과 외규장각 건물까지도 태워버렸다


당시 강화를 약탈했던 프랑스의 한 장교는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고 실토한 바 있다
그리하여 로즈 제독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군은 강화행궁을 폐허로 만드는 데 어떤 주저함도 없었을 것이다


강화를 떠나 중국 지푸항으로 돌아간 로즈 제독이 1867년 1월15일자로
역시 본국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본인은 우리의 출발을 11월 초순에는 거행해야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즉시 모든 국가의 소유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200여 척의 정크를 침몰시켰습니다
화약을 폭발시키고 무수한 창고들을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과 함께 소각하였습니다
임금의 저택과 관아가 남아 있을 뿐인데 이 관아의 일부는 우리 군인들이 거처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제일 마지막에 파괴하였습니다(중략)
본인은 본인의 계획대로 10일과 11일에 강화읍 관아의 파괴를 마치고
모두가 선박에 올라 일상의 업무로 돌아갔습니다"(『한불관계자료』)


그렇게 빼앗아간 도서들은 현재 프랑스박물간에 보관되어 있고
다시 세워진 강화의 외규장각은 내용물을 잃어버린 채 원위치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고
고려궁터를 구경하러 오는 이들도 외규장각에 관심을 갖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