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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江華 長井里 五層石塔).인천광역시 강화군 본문

☆~ 풍경소리/인천광역시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江華 長井里 五層石塔).인천광역시 강화군

푸른새벽* 2008. 12. 13. 17:00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江華 長井里 五層石塔)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은 강화도에서 유일한 고려 시대 석탑이다
발견 당시 도괴되었던 이 탑은 1960년에 보수.재건하였으나 상륜부는 아예 없어졌고
몸돌 위의 지붕돌도 많이 손상되었다
기단은 단층이고,지대석 위에 4매의 판석으로 중석을 구성하였다
그위로 기단부와 몸돌.지붕돌이 올라가 있는데,3층 부터는 몸돌이 없고 지붕돌만 나란히 포개져 있다
손상된 부분이 아니더라도 썩 우수한 솜씨로 빚은 탑은 아니다
전체적인 균형이나 체감률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높이가 3.5m이고 보물 제10호이다


이 탑은 구릉에서 파생된 지맥 위에 조성되었다는 점이 눈길을 끌고
탑 주변에는 평지가 별로 없어 절터의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건물터는 경사진 둔덕 아래 솔밭쯤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무너졌으나 오래된 축대와 계단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잔석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 절터는 강화로 천도한 고려 조정이 1234년 창건해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스러져간
봉은사(奉恩寺)터 라는 설이 있어 주목된다
봉은사는 원래 개성에 있던 절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로 광종 2년(951)에 창건되어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었으며
고려시대 국찰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몽고의 난으로 고려 조정은 강화로 천도했고 개성은 잠시나마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이에 고려는 강화에 제2의 봉은사를 창건했다는 기사가 『고려사』 고종 21년 4월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자리가 바로 그 터라는 설이다


"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던 차적의 집으로 봉은사를 만들고
민가를 헐어 왕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
이때는 비록 도읍을 옮긴 초창기였으나 모든 궁궐과 사찰의 명칭은 송도(松都.개성)를 모방하고
팔관회.연등회.행향도량(行香道場)등은 모두 옛식 대로 행하였다"


차적이 누구이든 민가를 헐어 절을 삼았다면 굳이 좁은 규모를 탓할 일은 아니다
아담하고 소박한 절이었을 것이다
다만 탑터로 보아 당시의 민가치고는 지대가 좀 높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봉은사는 어느 정도 절의 규모를 넓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사』는
"왕은 매년 2월14일이면 봉은사에 행차하여 연등회를 개최하였으며 수시로 참배하였다" 고쓰고 있다
이에 낮은 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둔 봉천산 동쪽 골짜기까지를 절터로 확보했던 것이다
현재 봉씨 종친회에서 봉씨 시조의 석상이라 섬기는 석조여래입상 주변이다


1270년 고려조정은 환도했고 봉은사는 자연 시선에서 멀어졌다
봉은사가 한 가문의 원찰로 변모해 가는 것은 바로 이 과정에서다
『봉씨호원록(奉氏湖源錄)』을 토대로 작성했음을 밝힌
근대의『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사찰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던
봉천우(奉天佑.봉씨의 시조 봉우(奉禑)의 5대손)가
그 선조에 대한 은혜와 백성을 구호한 덕을 기념하고자 하늘에 제를 올리는 대(臺)와 사찰을 지었다
이 대를 봉천대(奉天臺)라 하였고
사찰 이름을 봉은사라 하였다
조선 중기에 봉천대는 봉수로 이용되었다"


봉천우가 봉은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렵다
봉천우의 생몰년대는 기록에 없으나
충숙왕 14년(1327)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낸 14세기 인물로 나타나고 있고
봉은사는 이보다 100년 가까이 앞서 창건한 절이다
아마도 봉천우의 '창건'은
고려왕조의 개경 환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봉은사의 '중창'일 가능성이 많다
봉은사터에 남은 흔적이란 봉씨가의 시조로 곡해되고 있는 석조여래입상 1기가 유일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江華 長井里 五層石塔)
보물 제10호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 


이 탑은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은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