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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삼랑사지당간지주(慶州三郞寺址幢竿支柱).경북 경주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경주 삼랑사지당간지주(慶州三郞寺址幢竿支柱).경북 경주

푸른새벽* 2009. 11. 9. 20:58

 

 

 





 





 





 





 





 





 





 





 









 

 

경주삼랑사지당간지주(慶州三郞寺址幢竿支柱)


삼랑사는 597년(진평왕 19)에 준공되었으며,신문왕(681~692) 때의 승려 경흥이 머물면서 사찰이 번성하여 왕들의 행차가 잦았던 곳이라고 한다. 경흥은 문무왕이 임종 무렵 아들이었던 신문왕에게 차후 국사로 대접하라고 당부하여 신문왕이 즉위하자 국사로 삼아 삼랑사에 머무르게 했던 고승이었다. 헌강왕은 883년 삼랑사에 행차하여 문신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동경잡기』에는 삼랑사에 박물이 찬하고,요극일이 쓴 사적비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두 지주는 5m의 거리를 두고 외면을 마주보고 서 있었던 것을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따라서 원 위치와 상대 간격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기단과 간대석은 확인할 수 없지만 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정연한 기단이 결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치석과 장식 수법을 보이고 있다.내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각 면 외곽에 윤곽대(輪廓帶)를 낮게 돌리고,중앙에는 낮은 세로띠를 장식 하였다.윤곽대의 선은 지주 각 면 외곽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음각하여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였다.그리고 지주 중간부는 1단 낮게 깎아 장식하였다.전후면은 2Cm로 낮게 깎았고 외면은 4cm로 낮게 깎아 단을 형성하도록 하였다.그리고 외면은 외곽 모서리를 깎았으며,정상부는 유려한 호선을 그리고 외면과 이어지도록 치석하였다.또한 그 가운데에 1단의 굴곡을 두어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그런데 두 지주의 전체적인 양식은 동일하지만 각 부의 치석과 장식 수법에서 차이가 있다.먼저 지주부 외곽에 윤곽대를 장식하였는데 윤곽대를 장식하기 위한 음각석이 다름을 알 수 있다.또한 지주 정상부가 내면에서 외면으로 이어지면서 형성되는 호선과 그 가운데에 1단 굴곡을 둔 수법이 다름을 쉽게 알 수 있다.따라서 어느 한쪽 지주가 시간이 흘러 파손되거나 결실되자 새롭게 보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간을 고정하는 간은 간구와 간공을 시공하여 끼우도록 하였다.간구는 지주 내면 꼭대기에 작게 만들었으며,간공도 사각형으로 작게 시공하였다.특히 서쪽지주 간공은 윗부분을 경사지게 치석하였는데,이것은 당간을 세운 이후 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고정하기 위한 홈으로 생각된다.


삼랑사지 당간지주는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장식과 치석 수법에서 화려한 인상을 주고 있다.또한 조화와 비례도 잘 어울리고 있어 세련되 이미지를 풍긴다.이와 같은 치석 수법을 보이는 당간지주로는 불국사와 경주 동천동 당간지주 등 주로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당간지주 양식사에서는 가장 화려한 수법으로 치석되고 있어 불교미술 성행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삼랑사의 연혁으로 보아 8세기 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경주삼랑사지당간지주(慶州三郞寺址幢竿支柱)


보물  제127호 
경북 경주시 성건동


삼랑사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세워져 있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만 원래의 자리에 남아있는 듯하다.


마주 보는 면의 바깥 면에 세로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꼭대기는 바깥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내려가다가 한 단의 굴곡을 이루어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앙부분만 파여져 전체적으로 가늘어져 있다. 지주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아래위 두 군데에 파놓았다. 각 변의 길이가 적당하고, 높이와도 잘 조화되어 통일신라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앙부분의 두께를 얇게 하는 등 장식에 신경을 쓰고 있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