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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창녕 돌아보기.첫째날. 본문

답사.여행 후기

창녕 돌아보기.첫째날.

푸른새벽* 2010. 6. 28. 08:40

 전라남도와 경상남도가 내게 느껴지는 거리감은 상당히 다르다.

분명 거리상으로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것인데...

전라남도는 작정만하면 아주 수월하게 갈 수 있다는 생각인 반면 경상남도는 "상당히 먼곳이구나~"한다.

그래서였을까? 내게는 경상남도에 대한 자료가 상당히 빈약하다.가 본곳이 거의 없으니 그럴수밖에.

그래서 올 하반기에는 경상남도를 집중적으로 돌아보려 작정했고 그 첫번째로 꼽은 곳이 창녕.밀양.양산이었다.

어렵사리 얻은, 한장으로된 전국의 지자체별로 표시가 잘 된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창녕까지만 가면 밀양과 양산은 가로로 조로록 붙어 있으니 함께 답사동선을 잡기도 좋고~

문제는 일정인데...1박2일로는 당연히 무리다.비지정은 그만두고라도 지정문화재만 찾아본다해도 하루로는 턱도없는 곳이 창녕인지라 2박3일? 2박3일의 일정으로 창녕과 밀양.양산까지 돌아본다는 것도 무리지 싶기는했지만 3박4일의 일정을 잡으려니 4일째 되는 날부터 남쪽으로 요란한 비소식이 있기도하거니와 사흘이상 집을 비우는 것도 좀 그랬다.

'어차피 고생하러 나서는 길,더위먹어 졸도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빡세게 다녀보자'며 과감하게 2박3일의 일정을 잡고 떠났던 답사길.

 

 창녕에서 지정문화재만 돌아보려 맘 먹고 답사동선을 잡으려니 고속도로나들목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돌아보는 것이 낫겠다싶어 정했던 곳이 창녕의 관음사.관음사에는 탑과 석등과 불상이 있으며 관음사는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지IC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인 듯하다.

 

새벽 세시 반 우리나라와 나이지리아의 축구경기가 있던 전날 밤 휴대전화의 알람을 새벽 3시 10분에 맞춰놓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내가 잠을 잔 것인지 꿈만꾸었는지 도통 모를정도로 삼십분에 한번씩 깨다자다를 반복했으니...

잠안자고 기다리고 응원했던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 통했을까 다행히 우리나라는 16강의 문턱을 넘어들어갈 수 있게 되어 아침 일곱시에 집 나선 나의 답사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던 것은 사실이다.대~한민국~!!

 

 

집에서부터 꼭 304km의 거리에 있는 창녕 관음사.두 곳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관음사에 닿은 시간은 오전 11시.

남지나들목을 나와 곧바로 좌회전해서 잠시만 오면 왼쪽으로 관음사가 있다는 네비의 안내도 무시하고 지나쳤다가 얼만큼 더 가서 아니다싶어 돌아와서야 발견했던 관음사의 안내판.

이렇게 쉽게 보이는데 왜 지나쳤지?

 

 




관음사로 오르는 계단 아래의 주차장에 있는 견공.

관음사절집의 견공일까 아니면 주차장 오른편에 있는 음식점의 견공일까.

쳐다보는 눈망울 순하게 낯선 방문객에게 꼬리를 흔든다.

 

 




절집입구의 계단을 돌아오르면 관음사경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작고 아담한 절집인데 법당앞을 커다랗고 하얀탑이 지키고섰다.

설마 내가 찾아온 탑은 아니겠지.

 

 




관음사법당앞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 작은 공터엔 부도가 있다.

관음사부도는 내 답사자료에 없는데.

석종형인데 위에 얹혀진 것은 아무래도 탑의 지붕돌같다.원래는 없었으나 후에 누군가 얹어놓은 것이지 싶은데...

 

 




넓지 않은 절마당에 하얗고 커다란 탑 옆으로 아주 얌전히 자리하고 있는 도천삼층석탑(都泉三層石塔).2.3층 몸돌이 없어도 단정하고 이쁘다.

이 탑이 관음사탑이 아니고 도천삼층석탑인 것은 원래는 탑골이라 불리우던 보광사의 옛 터에 있었던 탑인데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가 되어 탑만 서 있던 것을, 1928년 현재의 관음사에 옮겨 세웠기에 그리 부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또 보광사삼층석탑이 아니고 도천삼층석탑일까?

 

탑의 내력이야 어떻든 이 탑을 보러 더운날 이곳까지 오게되었으니 내게 지어진 또하나의 소중한 인연이다.

 

 




도천삼층석탑이 있는 곳 뒤쪽으로는 앙징맞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연못속에는 연못보다 더 앙징맞은 석등이 있다.

절 마당을 밝혀야 할 석등이 왜 연못속에 있을까라는 의구심보다 감탄사가 먼저 나선다.

세상에~이쁘기도해라~

석등이 이렇게 이쁘고 깜찍해도 되는건가~ㅎ

진정 저 이쁜등이 돌로 만든 것이란 말인가.지붕돌꼭대기에 새겨진 무늬도 이쁘고 지붕돌끝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귀여운 동물조각 그리고

화창(火窓)...눈을 비비고 보고 또 다시 보아도 돌로 만든 것 같지않다.

자세히보지 않으면 화창은 금속으로 만든것이라는 생각이 들것이 분명하다.푸른 녹이슨 금속인 것같아 몇번이나 보고 또 보았다.

 

석등을 살피고 다시 탑을 살펴보는데 자꾸 어딘가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얼굴이 따가운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요사채쪽에 스님이 계셨다.가까이가서 인사하고 석등이 이렇게 연못속에 있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석등을 도난당했었지요.보다시피 이 석등이 크기가 자그마하고 지붕돌과 화창과 대석이 분리가 되는 것이라 옮겨가기가 수월해요.잃어버렸던 것을 어렵사리 찾았기에 아예 연못속에 심어(?)놓았습니다.그냥 물속에 있는 것 같아도 물속에 잠긴 석등의 아랫부분은 아주 견고하게 시멘트로 묶어 놓았고 보기엔 연못이 작아 깊지 않을 것 같아도 석등둘레 물의 깊이는 1m가 넘어요.석등만 붙잡고 내내 지킬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구나.그래서 이렇게 이쁜등이 물속에 잠겨있구나...

 

 




관음사엔 탑과 석등말고도 찾아볼 옛님이 또 있다.

 

창녕군의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된 관음사미륵존불상(觀音寺彌勒尊佛像)은 작은 보호각안에 계셨다.

 




 

관음사미륵존불상(觀音寺彌勒尊佛像)

원래의 자연석의 모양대로 새겼다지만 보기엔 조금 어색하다.

미륵의 머리부분이 아주 크게 표현된반면 신체의 부분은 많이 생략된 것 같다.

귀가 아주 크고 표정은 온화한 미륵님인데 사진은 꽝이다.

 

 




경상남도 창녕으로의 답사에서 가장 먼저 찾았던 곳 창녕 관음사.

아담한 탑이 있고 연못에 갇힌 이쁜 석등이 있고 미륵불이 있는 작은 절집 관음사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며 다음의 답사처로 향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찾은 답사처.

창녕군 영산면 성내리 영산초등학교.

계획대로라면 관음사를 돌아보고 바로 이 곳을 찾았어야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답사처에서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한시간 반이나 시간을 허비했다.허비한 시간을 채우려면 더 부지런하게 다녀야하는데...

 

임진왜란 때 폐사가 된 창녕의 보림사에 있던 것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는 보림사지삼층석탑(寶林寺址三層石塔)

탑은 영산초등학교 건물 앞 화단에 있었다.

 

 

 



관음사에서 보았던 도천삼층석탑처럼 보림사지탑도 2.3층 몸돌이 없다.

몸돌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그런지 유난히 기단이 거하다는 느낌이 든다.

조성시기는 통일신라후기의 것이다.

 

 



 

창녕으로의 답사를 떠나오기 전 영산만년교는 보수공사중이란 정보를 주신 분이 있었기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도 설마 그동안 보수공사를 마쳤겠지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산만년교는 아직도 보수공사중이었다.

 

보수공사가 끝나더라도 사진으로 보며 감탄에 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예전의 그 정취는 찾을 수 없을거라는 생각이든다.

홍예를 쌓아올린 막돌들이 씻은 듯 말갛고 다리를 지탱하는 석축도 자로 잰듯 가지런한데 기왕지사 새로 단장할 거라면 하천도 제대로 정비를 했으면 좋겠다. 물에 비친 다리가 허접하지 않도록.

 

 

 



만년교 앞에 서 있는 비석은 예전 그대로의 것인 듯하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를 다 알아보진 못해도 이방 장아무개와  호장 이아무개라는 한자는 눈에 금방 돌어온다.

 

영산만년교의 보수공사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내가 다시 쉽게 이 영산만년교를 찾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에 서운한 맘 가득안고 다음의 답사처로 발길을 돌린다.

 

 

 



오후 2시 15분.

창녕군 영산면 교리에 있는 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

석빙고의 사진이라면 으례히 볼 수 있었던 석빙고 입구

능묘같이 생긴 석빙고의 위쪽으로 환기구가 보인다.넓다란 돌이 두 개가 올려진 것을 보니 환기구는 두 개인가보다.

 

난 얼마전까지 예전에 얼음을 저장했었다는 석빙고가 서울이나 경주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 창녕에만 석빙고가 두 군데나 된다.

 

 

 



석빙고내부는 들어가지 못했다.

입구의 중간쯤 쇠창살로 문을 만들어 잠궈 놓았기 때문인데 조명장치도 없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니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얼음저장용도로 쓰지 않는다면 조명시설은 해도 괜찮지 않을까.

석빙고는 외관보다는 내부가 더 궁금하며 더 살펴볼 것이 많은데...

 

어두컴컴한 내부천장을 겨우 몇 컷 찍을 수 있었는데 지붕을 이루는 돌들이 심상치 않다.

그 옛날 얼음을 저장해서 여름까지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대단하고 이렇게 큰 돌을 가지고 원형의 돔을 쌓아 석빙고라는 구조물을 만든 것도 참 대단하다.

이곳에서는 얼음을 얼마나 긴 시간동안 저장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며 서늘한 바람이 휘도는 석빙고에서 나왔다.

 

 

 

 



영산석빙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영산면 구계리의 영산구계리석조여래좌상(靈山九溪里石造如來座像)

석불은 잘 지은 작은 전각안에 모셔져 있었다.

예의 그 촘촘한 살창안에.

살창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석불이 모셔진 전각의 옆쪽으로 난 문이 있었다.

문은 걸려 있었지만 쉬이 열어 볼 수 있겠다.

 

 

 



영산구계리석조여래좌상(靈山九溪里石造如來座像)은 검붉은 빛이다.

얼굴과 신체의 조각이 아주 단순하다.

마치 현대조각가의 솜씨처럼.

 

이곳 창녕은 한때는 번창했던 가야국의 영토였다.제철산업이 번창했던 가야국의 일부분이었던 창녕에서 만난 석불을 보며 가야국을 떠올렸고 가야국의 산업을 생각했던 것은 붉은 빛도는 구계리석불을 만든 석재에 혹 철의 성분이 함유된 것은 아닌지 싶었기때문.

 

 

 



구계리석불이 모셔진 아주 얌전하고 작은 전각을 뒤에서 담아보았다.

 

 



 

마산에 살고 있는,나의 창녕답사길을 어찌알고 관음사로 달려와서 점심식사를 함께한 뒤 더운데 고생하니 돌아가라는 내 말도 듣지않고 답사처내내 따라다닌 지인이 구계리석불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손을 뻗어 건넨다.

하얀찔레꽃.

그래,찔레꽃이 필 때구나. 은은한 香에 미소가 절로 번지며 찔레꽃이란 노래도 생각나고 또 찔레꽃이란 노래에 얽힌 일화도 생각난다.

십 여년전 늦가을 친구들과 오대산월정사 산사음악회에 갔을 때.

낮에 그렇게 쏟아지던 소나기는 음악회를 시작할 즈음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하게 개었고 밝은 달이 그야말로 月精을 흩뿌릴 때 산사음악회는 시작되었고 음악회 중반부 산사음악회의 단골초대가수 장사익씨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음악회관람객들로 발디딜틈 없이 꽉찬 절마당엔 등산복차림의 사람들도 제법 많았는데 우리 일행과 나란히 앉아 있던 등산객의 일행 중 한 여성이 장사익씨의 출연에 신이나서 박수를 치며 '찔레꽃~찔레꽃~!'하고 외치니 그 여성곁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하는 말이 "찔레꽃 붉게 물든 남쪽나라 내고향~ 하는 노래를 부른 사람이 저 사람입니까?"

그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남자를 쳐다봤고 이유도 모르는 그 남자는 무단히 얼굴을 붉혔던...

우리일행은 서로 쳐다보며 소리죽여 웃었던 그런 기억.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아무래도 창녕첫날의 답사로 계획한 곳을 다 돌아보진 못할 것 같다.

생각지도 않게 사람을 만났고 점심식사로 한시간이 넘게 허비했으니...

바쁘다.

맘도 바쁘고 몸도 바쁘다.

 

 



 

창녕군 영산면에선 이곳 법화암다층탑만 보면 그래도 비교적 지정문화재는 살핀 것 같다.

 

법화암은 고개를 허위허위 한참을 올라가야한다.

법화암다층탑은 청석탑이다.

어째 청석탑은 꼭 이리 꼭대기에 있는 절집에 많은 것인지.

원주에서도 치악산 자락 아주 비탈진 꼭대기에 있더니만.

 

 



영산법화암다층석탑(靈山法華庵多層石塔) 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나말여초(羅末麗初)유행한 청석탑(靑石塔)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원래는 영산초등학교에 있는 탑처럼 보림사 소속 암자에 있던 것을 현재의 법화암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전한다. 

 

 



 

나는 모든 탑을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탑날개에 새겨진 연꽃문양이 마치 잉어의 비늘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화암이 있는 산허리를 내려오면서 창녕의 영산면 답사를 끝내고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로 향한다.

그곳에는 항시 궁금했고 창녕이란 고장을 설렘으로 그리게했던 관룡사가 있다.

관룡사에 관해서는 따로이 '관룡사 돌아보기'를 쓰려하니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한다.

 

 관룡사와 용산대를 돌아보고 구게리로 향한 시간은 오후 5시 30분.






관룡사와 관룡사위쪽 산위에 계신 용선대석가여래를 만난 감흥이 채 가시기전  찾았던 창녕군 계성면 사리.

이곳에는 아주 근사한 석조광배가 있다고했다.

역시 자물쇠는 걸려 있는데 문은 잠기지 않았다.

 

 

 



사리석조광배(舍里石造光背)

참 근사한 광배다.

이렇게 훌륭한 광배는 문양하나하나 자세히 살피고 좌우에 새겨진 화불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딜 가셨길래,어떤 연유로 이렇게 광배만 남겨 놓고 보이질 않으시는지.

 

사리석조광배는 관룡사가는 길 오른편의 사리마을에 있으며 자동차길에서도 광배를 모셔놓은 전각이 보인다.

이 부근에 대좌도 있다는 정보를 꼼꼼하게 메모했는데 광배를 보는 순간 그만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그 사실을 깨달았으니...바보 멍충이.

 

이제 창녕 첫날답사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고암면으로 향한다.

고암면 감리엔 마애여래가 있기 때문이다.

감리마애여래상(甘里磨崖如來像)는 창녕읍에서 밀양방향으로 한참을 가면 고암삼림욕장이 있는데 마애불은 삼림욕장 안에 있단다.

사리석조광배가 있는 계성면에서 고암면으로 가는 길은 아늑하고 고적했고 청량했지만 고암삼림욕장에서 마애불은 찾지 못했다.

고암삼림욕장 입구엔 커다란 갈색의 표지판에 분명 감리마애여래상(甘里磨崖如來像)이라고 씌여 있었다.

하는수 없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오후 여섯시.

고암삼림욕장에서 돌아나온 시간.

더 이상의 답사는 나에게 무리다.아니 무리해서라도 답사를 계속할 수는 있지만 낯선곳에서 어둑신한 시간에 다니는 것은 싫다.

여름의 해가 길다해도 지금은 비의 계절.흐렸다 맑았다하는 날씨가 오후 여섯시쯤되니 어두워지려했다.

익숙한 곳이라해도 난 해저물녘에 밖에 있는 것은 싫어한다.

더우기 이런 낯선곳,낯선 길에서 해저물면 괜시리 집에가고 싶고 엄마가 보고싶어 울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숙소는 어디다 정할건데?"

"어차피 창녕읍을 답사해야하니 창녕읍에서 하룻밤 묵지뭐~"

"거참~! 맘이 안놓이네.혼자 우째 이 낯선곳에서 잠을 잘 수 있나? 마산가면 안되나?"

"에구~ 오늘 손해본 시간이 얼만데~ 한번 두번도 아니고 답사오면 매번 낯선곳에 잠자리를 정하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돌아가~"

"그러면 이곳에서 부곡이 가까우니 부곡에가는 것이 어때? 아무래도 유명한 관광지라 숙박시설이 이곳보다 나으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네.부곡까지는 11km정도 밖에 안되니 그렇게하지뭐~"

 

영 맘이 놓이질 않는다는 지인을 떠밀다시피 보내고 그제서야 맘 편하게 부곡으로 향했다.

온천물이 무슨무슨 병에 효험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답사첫날 밤 나는 그말을 믿기로했다.

덥고 습한날 새벽부터 답사내내 졸라매고 있던 바지밸트에 시달려 벌겋게 부풀어 올랐던 피부가 온천물로 샤워를하니 세 시간 후쯤 언제 그런 트러블이 있었냐는 듯 말짱했으니까.

그런데 그날 밤 모기에겐 몹시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