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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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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후기

창녕돌아보기.둘째날

푸른새벽* 2010. 6. 30. 17:10

 습기 가득한 장마철에도 아침은 상쾌하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어제밤 온통 풀어헤쳐놓았던 짐을 다시꾸린 후

(사흘동안 갈아입을 옷가지와 화장품 그리고 준비해간 음료수와 과일들과 간단하게나마 요기할 수 있는 대체식량들로 짐이 많다) 

집에서 준비해간,더운물만 있으면 간단하게 한끼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인스턴트 스프와 과일과 커피로 아침을 대신하고

하룻밤을 지냈던 부곡을 떠나 창녕읍으로 출발~

부곡에서 창녕읍까지는 이십여분이면 충분하다.

 

오늘은 또 얼마나 더우려나~

기온은 경기도 하남시보다 이쪽이 높지만 그나마 바람은 이곳이 시원하다.

 

 

 

 창녕답사 둘째날

아침 여덟시 반.

답사객에게 창녕이라는 고장을 가장 깊게 각인시켜 주는 술정리탑을 보러왔다.

술정리에는 동.서탑 두 기가 있는데 먼저 찾은 것은 술정리서삼층석탑(述亭里西三層石塔).

술정리서삼층석탑은 창녕읍 술정리 309-1번지의 잘 가꾸어진 공원에 있었다.

 

 




아주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지 않아도 한눈에 어디 아프거나 다친곳은 없는 탑 인것 같아 우선 안심이다.

창녕답사의 첫째날 네 기의 탑을 보았는데 모두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답사처에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찾아가 만난 옛님의 모습이 온전치 못하면 항시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데

이 여름아침에 만난 술정리탑은 그런 아프고 무거운 맘 떨쳐버리기에 충분하였다.

답사자료에는 술정리동탑보다 조각수법이나 예술적인 감각이 떨어진다고 씌여있어도 나는 이 탑이 마냥 이쁘고 대견하기만하다.

바람 시원한 아침에 만난 기분좋은 탑이다.

 

 




술정리서탑의 기단을 기대어 피어난 노란꽃.

들꽃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지만 아마도 씀바귀꽃이 맞지 싶다.

작은 씨앗이 어디서 날아와 이렇게 이쁜 탑아래서 홀연히 꽃을 피워냈을꼬.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고 많은 세월이 흘러도,바람시린 눈 펑펑내리는 겨울이어도

술정리서탑은 내게 씀바귀꽃과 같은 노란색의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술정리서탑에서 바라다보이는 마을의 풍경이 좋다.

모내기 끝난 가지런한 초록의 논에 먼산이 어룽대고 여름아침의 활기가 느껴지는 사람냄새나는 풍경.

어제는 답사처로 가는 길이나 답사처주변의 정서를 사진기에 담지 못했다.

예정에 없던 동행이 있었기에 내 마음대로 내 하고싶은대로 하질 못했기에 그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오늘 이 시간에도,오늘 이곳에서도 술정리탑을 바라보며 느긋이 앉아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어제 버린 시간이 아까워 더욱 바삐 다녀야하니 다음의 답사처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또 못내 아쉽다.

 

 

처음 경남으로 답사처를 정할 때 가장 먼저 창녕을 택했던 이유중의 하나가 당간지주 때문이었다.

창녕읍 직교리 54-11번지.

분명 네비는 직교리 자동찻길에서 목적지에 다다랐다고했고 창녕을 답사했던 이들도 직교리당간지주는 직교리천변에 있다고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개천변을 찾아보아도 당간지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어렵사리 당간지주를 찾았는데 이렇게 골목안에 숨어 있을 줄이야...

오래된 주택가골목길 깊숙하게,아주 옹색한 장소에 있다는 것이 보지 않았는데도,안내판만 보아도 벌써 가슴이 아릿하다.

 

 

 




꿈에도 그리던 당간지주였다.

세상에나...

 

직교리당간지주는 술정리서탑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개천의 건너편 골목에 있었다.

거리상으로 보아 술정리서탑과 이 당간지주가 같은 사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곰곰 생각해본다.

술정리서탑은 통일신라의 탑인데 이 직교리당간지주는 서탑보다 그 조성시기가 다소 떨어진다는데...

혹자는 이 당간지주가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며 평지에 세워진 사찰의 당간지주로서 사찰의 경계나 표식(標式)기능에 상당한 비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나는 서산의 동문동당간지주가 나라안에서 가장 불쌍한 당간지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직교리당간지주도 불쌍하다.짝을 잃고 외짝으로 오롯이 서 있는 당간지주나 가시철망에 꽁꽁묶인 당간지주만 불쌍한 것이 아니다.

 

가슴속에 묻어둔채 그리워만 하고 살아야 아름다운 첫사랑의 여운이 오래간다고 했던가.

직교리당간지주도 첫사랑처럼 만나지 못한채 그리워만 했다면 애틋할 망정 이리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것을.

 

 

 아리고 아린 가슴으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다.

술정리동탑을 만나러 가야지...







국보의 포스Force~!!

 

난 아직 탑에대한 눈이 뜨이질 않았다.아니 모든 옛님에 대한 눈이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국보나 보물이나 유형문화재나 별로 다르다고 생각질 않았고 또 그에대한 차이도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솔직히 어떤 것이 완전한 아름다움이고 어떤것이 모자란다는 느낌은 가지질 못했기에 불국사삼층석탑에도 그리 큰 감흥이나 설렘은 없었다.

그런데 술정리동삼층석탑을 만난 순간 가슴에 불화살 하나가 빠르고 깊게 박혔다.

그만큼 술정리동탑이 내게 주는 울림은 대단했고 국보라는 타이틀을 순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술정리동삼층석탑은 석탑의 완성작이랄 수 있다는 블국사삼층석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고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문득 불국사삼층석탑이 보고싶다.

 

 

 




창녕읍답사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많은 옛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창녕읍의 만옥정공원.

 

네비가 시키는대로 충실하게 고분고분 따랐더니 번듯한 주차장이 있는 공원의 정문을 두고 공원 뒷문으로 아주 상냥하게 안내했다.

에구 정문을 두고 이리 옹색한 골목의 후문으로 끌고갈 것은 무엇이람~ㅉㅉ

공원의 후문 좁은 골목길에 어렵게 주차를 했다.

이넘의 네비를 믿지 말아야하는데 낯선곳이니 어쩔수도 없고...애물단지.

 

 

만옥정공원의 후문으로 들어서니 나즈막하게 조성된 언덕에 비각이 보인다.

의심없이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라고 단정짓는다.






 

창녕읍 교상리 만옥정 공원에 있는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며 이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문화재청자료)

 

척경비?

척경비는 순수비와 다른 것일까? 다르다면 어떤 것이 다른 점일까?

순수비는 학교 다닐 때 많이 들었던 단어인데 척경비는 창녕의 답사자료를 정리하기 전까지는 들어 본 적이 없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순수비(巡狩碑)는 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이며

척경비(拓境碑)는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만든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의 비석에는 이 비를 세운경위와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씌여 있었다는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살펴도 한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척경비를 보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멀리 탑이 보인다.

만옥정 공원에 다른 탑이 없다면 저기 보이는 탑은 퇴천삼층석탑(兎川三層石塔)일 것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맞다.퇴천삼층석탑(兎川三層石塔)

탑이 있었던 사찰의 역사나 내력은 모른채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이곳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보호시설에서 내내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탑이 있는 곳 가까이에 불에 타서 시커멓게 그을리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듯한 건물이 있다.

창녕객사(昌寧客舍)

훼손되어 기둥만 남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곳이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곳이기도하다.

창녕객사는 원래의 자리에서 몇 번이나 옮겨졌다는데 애초에 건물을 지을 때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았다고 한다.

탁 트이게해서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지었다고하니 아마도 이 객사건물의 원위치는 아주 경관이 좋은 곳이었을게다.

 

 

 




객사옆 쪽으로는 잔디를 다듬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오전 10시. 여름이라 볕이 뜨겁다. 

지나고보니 자꾸 이 아주머니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객사건물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얼른 달려오더니 철제울타리 안에 둔 가방을 꺼내야하냐며 물었다.

그냥 괜찮다고할 것을.

문화재근처에는 가능하면 물건을 두지 않는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

날 더운데 땀흘리며 일하다가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시려할 때 뙤약볕으로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는 것 보다는 그래도 그늘에 두었던 물이 낫고

음식 쉬이 상하는 여름에 점심도시락 혹여 볕에 두었다가 상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그냥 괜찮다고 할 것을...

내내 맘에 걸렸다.

 

 




 

객사건물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

창녕척화비(昌寧斥和碑)는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세운 것이다.

 

< 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는 글자는 크게 새겨져있고 그 옆 작은 글씨로

<戒 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라고 씌여있다.

 

원래는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을 만옥정공원으로 옮겨온 것이라한다.

 

 

대원군척화비를 끝으로 만옥정공원을 나서려다가 아참~! 공원근처에 읍사무소가 있다고했지.

읍사무소의 주차장에 볼 일이있지~

이넘의 네비가 공원정문으로 안내했으면 바로 볼 수 있으련만

다시 자동차를 타고 공원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만옥정공원 아래쪽에 있는 창녕읍사무소

읍사무소주차장의 축대를 보러 온 것이다.

 

 

 




주차장의 석축도 범상치는 않아보이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축대를 받치고 있는 듯한 석조물.

용의 형상으로 보인다.

 

 

 




축대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이렇듯 두개의 용두로 보이는 석조물이 있다.

어디에 쓰였던 물건이었을까.

이리저리 살피고 또 살펴도 그 쓰임새가 궁금하고 이 거대한 용두가 이곳 주차장으로 오게된 연유도 궁금하였지만 지금까지 그 의문을 풀 방법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창녕읍사무소 주자장은 나라안에서 가장 호사스런 주차장이라는 생각과 도대체 그 용두의 쓰임새가 무언지,어디에 있던 것인지가 궁금하여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다시 다음의 답사처로 향한다

 

 




 

창녕읍 교리 440번지.

누군가가 귀띔해주었던 말.어느고장이나 향교가 있는 동네의 이름은 거의가 교동 아니면 교리라고. 

하긴 탑이 있는 마을은 거의가 탑동,탑골.탑선리였다.

 

반갑게도 창녕향교의 문이 열려있다.

 

 




 

열려진 문이 고마워 바로 계단을 오르려다가 문득 시선이 멈춘 곳.

향교의 석축으로 사용한 돌에 새겨진 연화문 그리고 그 위에 보이는 탑의 기단에서나 볼 수 있는 우주.탱주.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래~

 

 

 




향교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명륜당이 보이니 창녕향교도 전학후묘의 배치인 것이 분명하다.

창녕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며 다만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다시 세웠다는 것만 전한다.

 

창녕향교도 평시에는 문을 잠궈두겠지?

그런데 오늘은 어른들의 모임이 있는 날인가.향교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명륜당 마루엔 어르신들이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향교에 낯선객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러고장의 향교,특히 문열린 향교에서 사람을 만나는 경우엔 항시 듣는 말이 있었다.어떻게 오게 되었느냐.어디서 왔느냐는 질문.

그런데 창녕향교에 계신 분들은 향교에 들어서서 대성전까지 돌아보는동안 전혀 낯선객을 의식하지 않았고 눈길 한번 건네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런 무관심이 고맙지만 조금 의아하긴 했다.

 

 




 

 

 오전 10시 30분.

창녕향교를 뒤로하고 나오면서 맞닥뜨린 풍경.

저 꼬꼬댁꽃이 핀 골목을 돌아들어가면 엄마가 계실 것 같다.

아직 밥 때는 아닌데 허기가 몰려온다.

가슴이 싸아해진다.

 

 

 

 



허기가 몰려와 어디서든 밥을 좀 먹어야 겠다 싶어도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마음이 바쁘고 발걸음은 종종하다.

창녕읍 교리 294번지

자동찻길에서 좁은 골목길을 꺾어서 들어오니 그리넓지 않은 공터에 비각하나가 있다.

좁아도 자동차의 왕래가 잦은 골목이라 자동차를 이 비각 근처에 세웠다.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

답사자료를 챙길 때 이 탑금당치성문기비(塔金堂治成文記碑)를 어떻게 읽어야하나 잠시 혼란스러웠다.

몇 번을 읽어 본 후에 창녕 그리고 탑금당 그리고 치성문기 그리고 비라고 읽어야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  비~ㅋㅋ

 

 

 




창녕탑금당치성문기비(昌寧塔金堂治成文記碑)는 예전 창녕에 있었다는 인양사라는 사찰과 그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인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비로,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년(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을 새겼다고 한다.

 

자료를 챙길 때 각별히 붉은 글씨로 *뒷면을 꼼꼼하게 살필 것* 이라고 써 놓았었다.

비의 뒷면엔 단정한 모습의 스님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저러한 내력을 글자로 새긴 다른 비석들과는 달리 탑금당치성문기비의 뒷면에 스님을 조각해 놓은 까닭은 사찰 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승려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찰건립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기에...

 

 




 

비의 앞면은 빽빽하게 새겨진 글씨로 채워져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으니 탁본을 떠야 읽을 수 있을것 같다.

비의 위에 얹힌 지붕돌이 지나치게 커 보이기는 하지만 옆에서 보니 더욱 특별한 비 라는 생각이 든다.

 

 

덥다.

머리가 벗어질 정도로 덥고 바람이 있어도 후텁지근하다.

 





오전 10시 50분.

창녕읍 송현리 창녕석빙고

창녕석빙고는 창녕읍내의 번잡한 자동찻길 옆에 있었다.

어제 보고온 영산석빙고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창녕석빙고를 살필 때 각별하게 석빙고앞에 있는 비석을 살피란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석빙고앞에 있는 비석에는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가 만들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창녕석빙고는 영산석빙고보다 더 하다.

영산석빙고는 잠겨있었어도 내부는 살펴볼 수 있도록 살창문으로 해 두었더만 영산석빙고는 내부를 젼혀 살필 수가 없었다.

살창문 너머 또 하나의 붉은 철문으로 단단히 잠궈 놓았으니까.

 

 




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안내판으로 걸어놓은 사진만 찍을 수 밖에...

 

 

에구~ 더 덥네. 







송현동석불좌상을 찾으러 왔더니 송현동석불좌상은 보이지 않고 전각 매우 거한 절집이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관할의 절집이라 씌여진 간판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어슬렁 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 보인다.

갈색바탕의 표지판에 씌어진 글씨가 보인다.분명 송현동석불좌상이다.

갈색바탕의 표지판은 항시 반갑다.

답사여행이 아닌 단순한 여행지에서도 우연히 만나는 갈색표지판은 언제나 반갑다.

 

 




 

우거진 초록이 만들어 낸 그늘아래 나를 반기며 조용히 미소짓는듯 한 작은 전각.

불상도 아니고 탑도 아닌 작고 조촐한 전각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는 착각은 처음이다.

나도 병이 깊은가보다...

 

 




 

삼각형의 자연석에 강하게 돋을새김이 되어 있는 불상.

창녕송현동석불좌상(昌寧松峴洞石佛坐像)도 마애불이라고 한다.

불상의 뒷편 자연석은 따로이 문양을 새기지 않았어도 광배로써 충분히 훌륭하고 육계가 커다란 상호는 풍만하고 넉넉하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까닭으로 봄은 오듯이

저는 가만 있고 싶어도 여기옛님이 계신 까닭으로 또 발걸음 하였습니다.

오늘같은 날은 옛님과 마주 앉아 차 한 잔 굽신 기울이고 싶습니다.

 

 




 

창녕여고에도 탑이 있으니 빼먹지 말고 꼭 찾아보라던 말이 생각나서 지정문화재만 돌아보아도 모자랄 시간을 쪼갰다.

창녕읍 말흘리 51번지.

창녕여고 생활관앞에 탑이 있다는 말에 창녕여고 교문안으로 들어가 붉은 색의 건물을 돌아가며 살폈다.

앞쪽으로 보이는 흰건물은 창녕여중건물이고 뒷편의 붉은 건물이 창녕여고다.

 

사정없이 내려붓는 뙤약볕을 아랑곳 않고 건물주변을 한참동안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이 수상했던지 건물에서 서 너분의 남자분(물론 선생님이었을게다)들이 다가왔다.

"어쩐일로 건물주변을 서성거리십니까?" 정중하지만 그 표정들은 심상칠 않았다.

"네~ 창녕으로 답사를 왔는데 창녕여고에 탑이 있다고해서 찾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탑은 학교교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밖 길 건너에 있습니다." 긴장이 가득했던 표정이 사르르 풀리는 것이 보인다.

 

선생님들의 말을 듣고 운동장을 나오는데 창녕여중 쪽에서 다시 선생님인 듯한 남정네가 나와서 다시 묻는다.

어떻게 오셨느냐고.이러저러한 사정을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단다.

 

근자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일들로 학교의 선생님들이 외지인에게 몹시 신경을 쓰나보다.

암 그렇지.그래야하고말고.그런데 수업중에만 그럴 것이 아니라 방과후에도 그렇게 신경을 썼으면 좋겠는데...

 

 




 

창녕여고를 주소대로 찾아가면 학교로 오르는 자동찻길 경사진 언덕의 건너편에 근사한 건물이 있다.

창녕여고를 찾아오면서 유난히 눈에 띄었던 건물인데 이 건물이 창녕여고 생활관일 줄이야.

 

 




창녕여고생활관 옆으로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고 공원 옆쪽으로 유치원이 있다.

탑은 유치원의 놀이기구 옆에 서 있다.

붕대를 칭칭감은 몹시 아픈 환자같아 맘이 좋지 않다.

 

 

 오전 11시 40분

이제 창녕답사의 마지막인 석불사를 찾아간다.







석불사는 창녕여고와 마찬가지로 창녕읍 말흘리에 있다.

창녕여고와 주소상으로는 같은 동네인데 창녕여고는 읍내의 한 가운데 있는 듯하지만 석불사는 산속 깊숙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근래에 새로 쌓은 듯한 거대한 석축 위쪽 법당에 석불이 있겠지.

크지 않은 절집 마당을 살펴보고 법당 밖을 한바퀴 돌아도 석불을 볼 수 없었으니 분명 법당안에 있을 것이다.

 

 




석불사 대웅전에 모셔진 석불사석불입상(石佛寺石佛立像)

원래 석불사에 있던 불상이 아니라 옮겨온 것이라한다.

 

한개의 돌에 새겨진 불상은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보관을 쓴 듯 싶으며 상반신이 하반신보다 크게 표현되어 있다.

광배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소박하다.

 

 




 

한여름 햇살만 떼글떼글 돌아다니는 석불사 절마당에 들어서니 요사채에서 내다보는 이가 있었다.

석불사의 보살인 듯 싶은 후덕한 인상의 여인네는 가벼운 목례를 하는 내게 어찌 오셨냐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석불을 보러왔다고 말했더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운 일이다.

돌이켜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밀양의 무봉사라는 절집과 비교되어 더욱 창녕 석불사의 보살이 고맙게 생각되었다.

 

 

낮 12시 가 조금 넘은 시간 1박2일의 창녕답사를 마치고 밀양으로 향한다.

아침식사가 충실하지 못해서인지 12시가 조금 넘었는데 배가 몹시 고프다. 그리고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