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충북 옥천답사 한나절. 본문

답사.여행 후기

충북 옥천답사 한나절.

푸른새벽* 2010. 8. 8. 20:45

 열흘 전 친구들과 계곡으로 소풍을 갔을 때 한 친구가 물었다.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답사를 다녔으니 이젠 거의 다 돌아보았겠네?"

"어구야~ 그런말 하지마라.아직 한참 멀었다."

"아직도? 앞으로 얼마나 더 다녀야해?"

"여지껏 돌아본 곳이 나라안을 통틀어 봤을 때 겨우 30%정도 될까말까하니 멀어도 한참 멀었지~"

 

그렇다.

나라안의 문화유산이나 유적을 대충이라도 돌아보려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

각 지자체별로 저인망식 행태의 답사를 다니다보니 가 본곳보다 안가본 곳이 더 많다.

더우기 경북이나 경남은 거의 전무에 가까우니...

 

책상앞에 있는 지도를 살펴보니 그래도 충북은 지자체 단위가 적은 편이다.

단양.제천.충주.음성.진천.증평.괴산.청원.청주.보은까지는 답사를 했다고 할 수 있고 옥천.영동이 아직 미답처.

옥천.영동만 돌아보면 그래도 어설프나마 충북의 답사는 마쳤다고 할 수 있다.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는 더위가 아니라 줄줄 흐르는 물로 온몸을 적신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닌 더위.

한여름 땀으로 몸을 적실 각오를 하고 옥천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아침엔 좀 덜 덥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섰다.

너무 더워 도저히 답사를 할 수 없으면 일찍 돌아온다는 각오로.

 

 

 

 

아침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옥천의 첫번째 답사처로 찾은 용암사.

작은 돌들로 빽빽하게 쌓아 만든 석축에다 법당앞쪽을 막고 선 듯한 현대식 건물에 답답함이 느껴진다.

 

법당 지붕 위쪽 일견 버섯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척 봐도 저곳에 마애불이 있지 싶다.

 

 




 

촘촘하게 돌을 빡빡하게 붙인 계단을 오르면 금새 대웅전앞에 서게 된다.

용암사는 다른 전각들은 그리 큰 볼거리가 되질 않는다.

 

 

 




용암사 대웅전 내부엔 으리번쩍하게 개금한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용암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龍巖寺木造阿彌陀如來坐像)이 앞에 앉은 작은 불상이겠지.

분명 목조불상이라했는데 나무로 만든 것인지 돌로 만든것인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금칠을 거하게 했다.

 

집에 돌아와서 자료들을 다시 살펴보니 대웅전엔 다섯폭의 탱화가 모셔져 있고 그 탱화들이 각별하다는데 왜 탱화를 살펴볼 생각을 못했을까 그것이 못내 아쉽다.

 

 




 

용암사 대웅전 뒷편으로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위쪽으로 보이는 전각은 천불전이다.

이 철제계단을 올라가면 그 끝에 마애불이 있다고 한다.

마애불을 친견하러 철계단을 올랐다.

 

 




 

용암사대웅전 위쪽으로 잠시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용암사마애불(龍岩寺磨崖佛)

붉으스레한 기운이 도는 커다란 바위에 바위크기에 비해서는 작다 싶은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바위의 색깔이 묘하다.

전체적으로는 흰빛이 도는 바위에 어찌 마애불이 새겨진 곳만 붉은 빛이 강렬한지.

 

용암사마애불(龍岩寺磨崖佛)은 절집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하니 나도 마애불 앞에서 간절한 기원을 해 볼까~

 

용암사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은 옥천을 답사하려 맘 먹었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이 용암사쌍탑이었다.

그런데

각 지방을 다니면서 만났던 여러곳의 탑을 기억해보면 이 용암사쌍탑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탑도 부지기수였는데...

탑을 지지하고 있는 철제빔들 사이로 요리조리 돌아가며 살펴보니 이렇게 거하게 보수공사를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은 생각이 들기도했다.

에구~ 아직은 인연이 아닌가보네.

용암사에 한 번 더 오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네.

 

 

 




용암사쌍탑이 있는 자리에서서 내려다보이는 절마당이 한가롭다.

 

용암사에 도착하였을 때 가파른 경사지로 오르느라 아래쪽에 있는 주차장을 미처 보지 못하고 경내의 범종각 앞까지 자동차로 들어왔다.

도착하고 보니 어쩌나 싶었다.절마당에 자동차를 들이밀었으니 다시 돌아내려가야 마땅한 것이지만 내려가야 할 것인가 어쩔 것인가 잠시 생각을 했었던 것은 절마당엔 주차된 자동차가 있었기때문이었는데.

"당장 내려가세요.무슨 자동차를 여기까지 끌고 들어왔데~ 당장 저 아래 주차장으로 내려가세욧~!!"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분명 저렇게 소리치는 보살의 눈은 도끼눈일 것이다.

"네~죄송합니다.곧 내려갈게요~"

 

엄청 기분이 나빴다.

절마당까지 자동차를 들이민 내가 우선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잘못했다는 미안함보다 불쾌한 감정이 훨씬 컸다. 

와~너무하다.아침부터 이런 상황이 생기다니.자동차를 경내까지 들이민 것이 절집에서 용납못하는 큰 잘못이라 치더라도

이 아침에 그리 큰 소리로 그리 도끼눈을 뜨고 소리를 지를 것은 무엇이람.

"여기는 절마당이니 자동차를 주차하면 안되고 저 아래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니 거기에 주차하고 오세요~"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절집에 있는 보살의 말 한마디로 그 절집의 인심을 알 수 있다는데 물색없이 용암사가 엄청 불친절하게 각인된다.

내가 그렇게 소리를 치고 눈을 흘겨야만 말을 들을 그런 사람으로 보였나.

거개의 절집에서 만나는 보살들은 차분하고 상냥하다는 내 평소의 생각이 머리꼭대기에서 허허거리고 웃는다.

 

에이~

오늘 첫 답사처에서 이리 언짢았으니 오늘답사는 그리 즐거울 것 같지 않다.

 

도끼눈을 뜨고 찬바람 일으키며 걸어가는 보살이 무서워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을 제대로 사진기에 담지 못했고 탱화는 언감생심.

그랬다.그래서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불상의 사진이 어설프고 형편없다.보살이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급하게 찍었으니까.

 

 




 

 옥천은 향수의 고장이라고 했던가.

 

넓은 별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정지용의 詩 '향수' 중에서)

 

평소엔 정지용이란 시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詩 '향수'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가슴에 감동의 물결을 일렁이게 만든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고

이 시에 곡을 붙여 어느 가수가 불렀던 향수라는 노래도 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용암사쌍탑 근처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서 문득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를 떠올렸고 노래까지 흥얼거리게 되었다.

넓은 별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탑이 있는 풍경.

옥천의 두번째 답사처인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옥천두암리삼층석탑(沃川斗岩里三層石塔).

큰 나무가 있고 오래된 집들이 있는 골목길 저기 탑이 보인다.

 

 




 

1층 몸돌이 길쭉한 것이 설핏 고려탑이지 싶다.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에 있는 두암리삼층석탑(沃川斗岩里三層石塔)

탑이 자리한 이곳에서 고려시대의 것인 옛기와가 발견되어 당시에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원면 이원리에 있는 탑의 이름이 두암리삼층석탑일까.

자료를 다시 살펴보니 두암리탑이 있는 이 마을이 이원면 이원리 두암마을이란다.

 

삼층 지붕돌 귀퉁이가 떨어지긴 했어도 그리 크게 훼손된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다 싶은 두암리삼층석탑.

야무진 모양새는 아니어도,옹색한 골목 한쪽에 자리하고 있어도 이 탑을 바라보는 눈이 흐뭇하고 여유로웠던 까닭은...

탑 앞쪽의 건물 지붕위를 장식(그랬다.분명 장식이었다.)하고 있는 호박넝쿨 때문.

 





 

탑의 바로 앞쪽 건물의 담장에도 호박넝쿨이 이렇듯 풍성하게 걸려(?) 있었다.

맘이 넉넉해진다.눈이 순해지는 풍경이다.

 

 




 

두암리탑을 보고 바로 금암리사지탑을 찾아 동이면으로 발길을 돌리려다가 두암리탑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었던 갈색의 안내표지판이 생각났다. 창주서원묘정비.난 무슨무슨 碑에는 아직 관심이 크게 없는 편이다. 그런데 두암리탑 근처에 묘정비가 있다니 기왕지사 이곳까지 왔으니,또 가까운 곳에 있다니 살펴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묘정비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아서인지 묘정비를 찾기가 만만찮았다.

분명 네비가 가르쳐준대로 갔음에도 묘정비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기에 몇번이고 작은 마을을 이리저리 돌았다.

네비상으로는 분명 코 앞에 있는데.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혹시 싶어서 자동차를 세우고 올라가 보았던 곳.묘정비가 저 전각안에 모셔져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묘정비가 모셔진 전각은 아니었다.

무슨무슨 姓씨의 문중에서 관리하는 재실이었다.

에이~

날 더운데 괜한 고생했네.

 

 




 

한참을 돌고 돌아서 찾았다.에그~그야말로 코 앞에 있었는데 다른 골목들만 뒤지고 다녔으니.

 

묘정비는 서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그 서원에서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 등을 기록하여 서원 앞에 세우는 비라고 한다.

이 비가 서 있는 이곳이 예전에 창주서원이 있던 자리라는데 지금은 관리가 안되어서 그런지 온통 수북하게 자란 풀들로 발을 딛기가 겁난다.

혹여 뱀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창주서원묘정비(滄州書院廟庭碑)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조선시대의 문신 곡운(谷雲)김수증(金壽增)이 썼다고 한다.비의 자세한 형태는 내 블로그 풍경소리에 자세히 게시할 것이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금암리사지삼층탑(金岩里寺址三層石塔).옥천답사의 네 번째.

 

이 탑을 찾으려고 헤맨 사연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많은 탑을 찾아 헤맨 나의 내력도 만만치는 않은데 날 더워서 그랬을까 유독 이 탑 찾는데 애를 먹은 것 같다.

찾고보니 수월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옥천군 동이면 금암4리 탑선골이라는 것 뿐.

자주가는 까페의 자료를 몽땅 다 찾아보아도 사진은 많은데 정확하게 탑을 찾아가는 정보는 없었다.

시골동네니까,더우기 탑선골이라니까 근처에가서 탑선골을 물어보면 될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을 가졌더랬는데.

우선 탑선골이 어디에있냐 물어볼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문이 열린 집마다 들어가서 아무리 사람을 불러도 대꾸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사람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농번기...

어찌어찌 돌다가 마주친 버스정류장엔 금암2리라 적혀있다.다짜고짜 금암2리도 들어가 한참을 돌다 어렵사리 만난 주민에게 물어보니 금암4리는 비닐하우스가 있는 소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한단다.주민이 가르쳐준 곳을 찾아가보았으나 금암4리는 없고 금암3리 뿐이다.

할수없다는 심정으로 금암3리 마을깊숙이 들어갔다.그리곤 창문이 열린 집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계십니까를 반복하니 나이지긋한 어르신이 밖을 내다본다.

"어르신~ 금암4리는 어디로 가야하나요?"

"여그는 금암3리여.금암4리는 없어~"

"그러면 탑선골은 어디인가요?"

"그건 몰러~여긴 용암말이여~ 근디 어찌 그래?"

"예~금암리에 탑이 있다고해서 찾아왔는데요~"

"이~ 저기 위쪽에 쪼끄만한 탑이 하나 있긴있어~"

"어디에요?"

"저기 위쪽에"

 

아~ 다행이다.금암리탑은 금암4리 탑선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암3리 용암말에 있었다.

어르신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빽빽하게 자란 풀 들사이로 빼꼼하게 탑의 상륜부와 지붕돌이 보였다.

 

 




 

아직도 손목과 발목이 그 때 가시에 긁혀 벌겋게 부풀어 올랐던 것이 사그라지지 않아 자꾸 긁는다.

 

긴소매 옷을 입었지만 날 더워 소매 걷어부치고 탑을 향하여 언덕을 올라가 사진을 찍고 더 가까이서 살펴보려고 겨우겨우 탑근처 바위에 올라간 것 까지는 좋은데 이제 내려올 일이 걱정이다. 

너무너무 덥수룩하게,빽빽하게 자란 주위의 풀들때문에 발을 어디로 디뎌야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럴때 낫이 있으면 좋겠다.이젠 답사에서의 필수품으로 낫도 추가를 해야할 것 같다.

아니나다를까 평형감각 형편없는 탓에 발을 잘못 디뎌 가시덤불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가시덤불의 깊이가 어찌나 깊숙하던지 자칫 탈출하지 못할 뻔 하였다.근처에 대나무가 없었으면.

가시에 긁힌 아픔을 느끼기보단 혹여 발 많은 벌레나 뱀이라도 있으면 우째~초조하고 겁나고...

 

겨우겨우 언덕을 내려오니 티셔츠와 바지가 형편없다.손목이 긁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발목까지.바지에 붙은 찔레덩쿨에 진저리가 쳐진다.

아침에 집 나서면서 날 더울텐데 반바지차림에 지난번 계곡에 발담글 때 신었던 간편한 신발을 신을까도 생각했었더랬는데...

긴바지에 목이 긴 등산화 신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흘러내린 땀을 닦기보단 손목과 팔을 벅벅 긁으며 문득 해남 청신리탑과 증평의 연탄리사지탑을 생각했다.

해남 청신리탑이나 증평연탄리사지탑이나 모두 옥천 금암리탑처럼 비지정문화재다.

그렇지만 대접은 천양지차다.

해남청신리탑은 청신리주민의 지극정성으로 잘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어귀에 어느 국보급문화재 못지 않게 커다란 안내판을 세워두었고

증평의 연탄리사지탑도 그냥 멋모르고 보기엔 그저 돌덩이 몇개 올려놓은 것 같지만 그 동네 사람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옥천의 금암리사지탑은...

증평의 연탄리사지탑은 그렇다치더라도 해남청신리탑보다 훨씬 야무지고 당당하고 이쁜데 마을에서 받는 대접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용암말에 사는 누구라도 딱 5분만 시간을 할애해서 농촌에서 흔하게 들고다니는 낫으로 근처의 풀들을 베어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탑이나 사람이나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팔자소관인가보다.

 

 

 




옥천의 네 번째 답사처인 죽향리사지탑을 찾아 죽향초등학교로 왔다.

죽향리사지탑은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저기 교문사이로 보이는 화단에 길쭉하고 싱거워보이는 탑이 있네.우째 마곡사에 있는 탑이 생각날꼬~

 

 




높이가 3m인 죽향리사지삼층석탑(沃川竹香里寺址三層石塔)과 죽향리라는 사찰에 대한 정보를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이 탑을 먼저 친견한 옛님방 선과님의 글을 인용한다.

*죽향리사지는 옥천읍 죽향리 탑산이골 마을 민가 주변에 있는 절터로 옛 문헌기록은 전혀 없고 탑산이골이라는 지명과 현존하는 3층석탑을 통하여 폐사지임을 알 수 있다. 사지는 현재 모두 주택지로 변하여 있고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새로 개통된 옥천-보은간의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어 사지 전체가 흔적을 잃었다.  사지에 남아 있던 3층석탑을 일제강점기에 죽향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옥천 죽향초등학교에서는 죽향리사지탑만 보고 탑과 함께 있다는 서수(瑞獸)는 찾지 못했다.

 

 

죽향리초등학교를 뒤로하고 다음의 답사처인 옥천향교로 향한다.





 

옥천향교를 찾아가다 길에서 만난 안내문 때문에 옥천향교보다 우선 옥주사마소를 찾게 되었다.

옥주사마소는 자동찻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 중간에 있다.

 





 

살펴보긴 틀렸다.

단단히 잠궈두었더라도 대문에 관리인의 연락처라도 남겨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옥주사마소는 나라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니 누구라도 살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문 잠긴 사마소의 담장을 하릴없이 한바퀴 빙 돌아볼 수 밖에.

 

사마소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주사마소는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마소에서 향교까지 가는 길이 향수길이다.

옥천엔 향수.지용 이라는 단어가 참 흔하다.그만큼 세간엔 정지용의 고향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옥천이다.

 




 

 

옥주사마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옥천향교가 있다.

자동찻길에서 바로 보이는 향교의 홍살문과 명륜당.

명륜당의 삼태극문양이 무척 선명하다.

 

 




 

오늘은 왜 이리 보수공사 중인 곳이 많을까.

용암사에서도 이런 철제빔을 싫컷 보고왔구만 옥천향교도...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있을런지.

 

 




 

향교입구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보니 문이 달리지 않은 담장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보수공사중이라 향교안쪽은 각종 자재들로 어지러웠는데 공사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놓은 대성전도 굳게 잠겨 있으니 멀찍이서 삼태극문양 선명한 내삼문 너머로 대성전의 편액만 겨우 보고...

 

옥천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고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천향교옆에는 향교관리인이 살고 있는 살림집이 붙어 있었고 다행이 요란스런 견공은 없었다.

 

 

 




향교에 들때는 보지 못했던 하마비가 향교를 돌아나오는데 눈에 띈다.

네~그렇지요.

저도  저기 멀찍이 자동차를 세워두고 왔습니다~

 

 




 

옥천읍 금구리에 있는 옥천경찰서.

경찰서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담 옆에 자그마한 탑하나가 바로 보인다.

경찰서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우고 사진기를 챙겨 바로 탑을 향해 걸어가니 경찰소 정문초소에서 경비인 듯한 사람이 나온다.

통상 우리가 보는 경찰의 제복을 입지 않아서 뭘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오셨어요?"

"이 탑보러요~"

"어디서 오셨어요?"

"경기도 하남시에서 왔습니다~"

 

탑의 모양새는 온전하지 않지만 살풋 육감적인 냄새가 난다. 나이는 어리지만 몸태는 암팡진 처자를 보는 것 같은느낌이 들었던 것은

희미하나마 작은 탑의 몸매에 새개진 두개의 탱주와 두개의 우주 그리고 상륜부 복발에 남아 있는 찰주공의 흔적 때문이다.

작고 온전치 못해 보여도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는...

 

 

 




처자에게 바치는 것인양 나리꽃 한송이가 탑처마에 기대어있는 풍경처럼 끈끈한 더위의 팔월도 육감적이다.

 

 

 




탑이 있는 곳 건너편 경비실의 뒷편에 있는 자그마한 부도.

이 부도는 원래 군북면 증약리 부도골 절터 입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증약리 옛 면사무소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의 위치인 옥천경

찰서로 옮겼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부도지만 어디 한군데 허술한 곳 없이 야물딱지고 당차다.

 

 

에구 덥다 더워~

이제 옥천의 아홉번째 답사처인 옥천청석교를 찾아 안내면 장계리에 있다는 옥천향토사료관으로 향한다.







옥천군 안내면 장계리 옥천향토사료관.

청석교를 먼저 살펴보고 사료관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별다른 특징은 없이 그저 밋밋한,관리도 제대로 안되는 것 같은 느낌을

.

이곳의 주차장에도 사람들은 많았지만 대부분이 향토사료관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향토사료관 아래쪽의 유원지를 찾는 차림새들이다.

 

 

 




옥천향토사료관으로 입장하기 전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하나.

 

 

 




그렇지 싶었는데 맞다.

청석교라 새겨진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옥천청석교(沃川靑石橋)...

할 말을 잊는다.

 




 

 

청석교는 신라 문무왕때인 660년경에 만든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니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청석교가 있던자리는 군북면 증약리 경부선 철도 자리였으나 철도공사로 인하여 증약마을 입구로 옮겼으며, 그 후 수해로 인하여 2001년 4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경부선철도가 지나가는 증약마을은 찰방역이 있었던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고 한다.

제 있던 자리를 떠나 이리저리 옮아다닌 상처가 많은 다리다.

 

다리는 사람이나 우마차를 건네주어야 제 몫을 다하는 것인데 이렇듯 조용한 곳으로 치워져(?) 있으니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구나 싶어도 또 사람이나 다리나 쉴 때는 쉬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천년이 훨씬넘게 제 몫을 했으니 이제 이렇게 조용하고 한가하게 쉴때도 되었지하는 생각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지 막상 청석교의 입장이라면 어떨까.과연 모든 의무 다 내려놓은 것이 행복하기만 할까.

아무리 돌로 만든 다리라해도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 온지라 다리도 늙는구나싶다.

늙은 다리와 한창 물오른 연꽃의 대비가 묘하다.

 

 




 

청석교를 만나고 옥천향토사료관에 잠시 들렀다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예스런 건물이 눈에 띈다.옆모습만 보면 무슨 누각같기도하고.

안 가볼 수 없지.

 

 




 

이곳은 옥천 삼양리에 있던 기와가마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삼양리 기와가마는 대전과 옥천 사이의 경부선 선로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조사되었는데 2002년에 발굴된 이 유적에서는 고려시대의 기와가마터와 함께 고려.조선시대의 건물터가 발견되었고 조사 당시 가마터의 천장과 굴뚝 부분은 이미 파괴되어 없어졌으며 불을 때는 연소실과 기와를 굽는 소성실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0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고 한다.

  

머리를 태울 듯 내리 퍼붓는 햇볕도 아랑곳않고 기와가마의 안내문을 자세히 살피고 사진을 찍는데 저 아래의 계곡 유원지에서 시끄럽게 계속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여름햇볕을 목덜미로 겨드랑이 사이로 한아름 들이미는 것 같다.

 

밤 바바밤밤 발라버려 밤 바바밤밤 발라버려~

떡볶이에 고추장을 발라버려

비빔밥에 고추장을 발라버려

삼겹살에 쌈장을 발라버려...

타이거 JK의 걸쭉한 목소리가 자꾸 발라버리란다.

떡볶이에 고추장을 바르거나 삼겹살에 쌈장을 발라버리라는 것도 노랫말이 되는구나싶어 괜스레 웃음이 나왔지만 한여름 뙤약볕아래서 들려오는 타이거의 노래는 끈적임이 심하다.좋아하는 가수중의 한사람인데.

하긴 이 여름 한낮에 껌벅 넘어가도록 좋아하는 샤이니도 반갑지 않으니...

 

 





향토사료관 앞쪽에 있는 예쁜 건물에 세워진 빨간 우체통.

안내문에는 오른쪽에 있는 우체통엔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왼쪽에 있는 우체통엔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라고 적혀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과거나 미래의 나에게 부칠 편지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지금 나는 과거를 돌아볼 여유도,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이 오로지 바로 코 앞의 현실에만 급급하니...

뒷통수를 호되게 얻어 맞은 것 같다.

 

 슬며시 시장기가 돈다.

아침 다섯시에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으니 시장한 것이 당연하다.

오후 1시가 가까운 시간 옥천답사의 마지막인 가산사로 향한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으니 가산사근처 나무그늘에서 도시락을 펼칠 작정이다. 






충북 옥천군 안내면 답양리 가산사를 찾아들어가는 길.

자동찻길에서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오니 아직 절집은 한참을 더 가야할 것 같은데 개울가에 천막쳐진 것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가산사라고 천막에 씌여있다.

가산사의 천막이 왜 이곳에라는 의문이 들었다.

절집사람들이 개울가에서 놀다가 미처 천막 걷는 것을 잊어버렸을까.

자동차를 세우고 개울가의 천막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산사를 찾아오는 누구라도 이곳 천막의 그늘에서 맑은 개울물에 발 담그며 잠시 쉬어가라는 배려가 아닐까 싶은.

내 생각이 맞다면 가산사는 넉넉한 품의 절집임이 분명하다.

혹여 그건 아니라고해도 난 그렇게 믿고싶다.

 

 

 




오래된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진 경사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절집임을 나타내는 일주문도,천왕문도 없는 조촐한 절집 가산사에 닿는다.

 

 




 

담장엔 능소화가 졸래졸래 넝쿨을 늘어뜨리고 극락전 앞을 음전히 지키고 섰는 나무들이 편안한 절집.

가산사 절마당에도 팔월의 햇빛은 넘쳐난다.




 

 

답사를 다니며 꽃사진은 많이 찍는 편이 아닌데 가산사 담장에 고개늘어뜨린 능소화는 사진기에 담았다.

끈질긴 생명력의 능소화에 대한 전설 한자락도 떠올리며

 

 




 

나즈막한 기단위에 앉은 극락전은 팔작지붕이 날아갈 듯 경쾌하고 근래에 단청을 부분적으로나마 손 본 것 같은데 요란하거나 호사스럽지 않아 좋고 단정한 살문과 궁창을 장식한 꽃그림이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한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꽃살문이 화려하거나 조각장식이 별스러운것에 관심이 많았고 눈이 끌렸었다.

그러나 이젠 이렇게 아무 장식이 없는 살문에 더 정이간다.

가산사 극락전의 살문은 그런 내 변화된 정서에 딱 들어맞다.

단정하고 소박하다는 표현은 이런 때를 두고 쓰는 말이리라.

 

 




극락전 궁창에 그려진 붉은 꽃과 극락전 오르는 계단 옆에 핀 연꽃.

팔월 한낮의 뜨거움과 번잡함을 잊게하는 고요의 풍경.

탑도 부도도 명성자자한 전각도 없는 가산사에서 나는 그들보다 더 귀한 고요와 여유를 보았다. 

 

 

 



옥천을 답사하겠다 맘먹고 자료들을 챙길 때 가산사라는 자료를 보고 처음엔 무슨 인물을 배향해 놓은 사당인 줄 알았다.

가산사라는 명칭만 보고.

佳 아름다울 가.山 뫼산.寺 절사. 

절집이 기댄 산이 아름다운 줄은 모르겠다.산이 아름답다는 것은 근처 산에 올라 바라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절집인심 넉넉하고 고요와 여유가 있는 절집인 줄은 이제 알았다.

 

창건 연대와 창건자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었으나 신라와 고려를 통해 조선 선조 때까지 절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암자로 사찰과 명맥만을 유지하여 왔으리라 짐작되는 가산사를 마지막으로 여름 한나절의 옥천 답사를 끝냈다.

 

 

이제 충북의 미답처는 영동군 뿐이다.

 

 

 












 

 

'답사.여행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성 용주사 돌아보기   (0) 2010.08.26
화성시 돌아보기  (0) 2010.08.20
보호전각이 꼭 필요했는지.  (0) 2010.07.14
창녕 관룡사 돌아보기.경남 창녕  (0) 2010.07.02
창녕돌아보기.둘째날  (0) 2010.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