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화성시 돌아보기 본문

답사.여행 후기

화성시 돌아보기

푸른새벽* 2010. 8. 20. 10:38

 경기도 화성시...

화성시는 내가 사는 하남시와 같은 경기도의 도시지만 하남시가 서울의 동남쪽에 위치한 반면 화성시는 서울 서남쪽의 도시다.

특별하게 작정하지 않아도 쉬이 가 볼 수 있는 고장을,

내력 잘 알려진 유명한 절집 용주사가 있고 조선왕조의 22대 임금인 정조의 능묘가 있는 고장이지만

여지껏 찾아보질 않았던 것은(찾아보질 못했던 것이 아니라) 그 지독한 서울근교의,특히 서울 서남쪽의 도로사정 때문이었다.

그쪽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아프다.

 

용주사 (범종.중종.대웅전.천보루.오층석탑 두기) 국보.보물급 문화재 그득한 절집이지만

내가 쉽게 살펴 볼 수 있을 문화재들은 대충 이런정도.

융릉.건릉.

봉림사.봉림사목아미타불좌상.

남양향교.

관항리삼층석탑.

문학리삼층석탑.

남이장군묘...

이정도가 내가 화성시에서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던 옛님이다.

자료를 정리하면서 화성문학리삼층석탑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화성답사에서 제외시켰다.

그렇다면

오늘 화성에서 찾아봐야 할 곳은 모두 여섯군데.

 

도로사정 나쁜 곳이지만 그래도 거리상으로 멀지 않은 곳이기에 아침 아홉시에 집을 나섰다.

하늘은 어두운 잿빛이다. 

 

 그렇겠지 믿고 있었던 것처럼 예의 경부고속도로의 정체는 대단하였고

100킬로도 되지 않는 거리를 두어시간이 걸려 화성시에 들어올 수 있었다.

고속도로 나들목에서 용주사로 가는 도중에 만났던 길안내 표지판이 효행길이다.

효심 지극했다던 정조임금의 능묘가 있는 고장이라서 그런가.효행길...

 

 




오전 11시 30분 경 화성의 첫 번째 답사처인 용주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용주사에 관해서는 따로이 용주사돌아보기를 쓸 것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한 시간 가까이 용주사를 돌아보고 용주사에서 5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융건릉을 찾았다.

장마가 끝났다는데도 하늘은 푸득푸득한 빗방울을 잔뜩 매달고 있다.

 

입장료 1000원을 지불하고 묘역으로 들어갔다.

 

 




융건릉 매표소에서 잠시 걸으면 이런 갈림길을 만난다.

나는 오른쪽길을 택했다.

우선 융릉부터 살펴보려고.

 

 




 융릉을 향해서 나무 울울창창한 소롯한 흙길을 걸어가다 만난 그윽하고 한가한 그림같은 풍경을 만났다.

모자쓴 남정네와 양산쓴 여인네.

금방이라도 빗방울 후드득댈 날씨라 양산이 생경하지만 두 남녀 사이에 양산이 있어 풍경은 더 아름답다.

저 나이지긋해 보이는 한쌍이 이런날 이런 곳에서 나누는 이야기에도 싱그러운 초록은 함뿍 묻어 있을 것 같다.

 




 

융릉(隆陵)의 홍살문 앞에 섰다.

여느 왕릉처럼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참도가 곧게 나 있고,참도 좌우에는 박석이 가지런하게 깔렸다.

 

 




융건릉입구에 도착하여 매표소보다 매표소 옆의 관리소에 들렀었다.

서울과 남양주의 능묘를 살펴봤을 때의 기억을 살려 관리소에 양해를 구하고 능묘위쪽까지 살펴보고 싶어서 였는데

"죄송하지만 지금은 능묘위까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융건릉관리소에서는 시간을 정하여 능묘위쪽까지 관람을 할 수 있게하는데 오전 11시와 오후 2시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관람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어투다.

어쩌랴~

꼭 능묘 위쪽까지 살펴보고 싶었는데 두어시간을 기다려야 가능하다니 오늘은 그저 능묘근처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사진기 렌즈를 끝까지 끌어당기는 걸로 달랠 수 밖에.

 

 





융릉(隆陵)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이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영조는 마흔 둘에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효장세자가 10살에 죽은 지 7년 만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당연히 사도세자에게 거는 영조의 기대는 무척이나 컸으리라.사도세자는 2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고,10살에 가례를 올리고,15세에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다.그러나 굼뜨고 과묵하며 자기표현에 서툴렀던 사도세자는 민첩하고 예민하며 감저의 기복이 심했던 영조 눈에 차지 않았다.영조의 기대는 점점 답답함과 애증으로 변질됐다.사도세자는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미약한 소론과 남인,소북 세력이 지지하고 있었던 사도세자를 노론이 좋아할 리 없었고,노론과 한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과 숙의 문씨는 영조와 세자를 이간하기 바빴다.사도세자의 처가인 혜경궁 홍씨(풍산 홍씨) 집안은 노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뼛속까지 노론 집안이었다.게다가 영조는 노론에게 큰 빚을 지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깊은 불화와 노론의 정치적 압박,거기에 내관과 궁녀,왕손의 어미마저 살해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궁을 비우고 20여 일동안이나 관서지방(평양)을 다녀온 사도세자의 수상한 행동...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왕위는 물론,생명의 위협마져 느끼게 된다. 결국 영조는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올린 나경언의 상소를 받고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한다.영조가 말했다 "네가 만약 스스로 죽는다면 조선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 것이다.너는 속히 죽으라"(이광현 『임오일기』)

그러나 세자의 읍소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고,영조는 결국 사도세자를 폐서인하고 뒤주에 가두어 손수 자물쇠를 채우고 말았다.

 

혜경궁 홍씨는 죽어가는 남편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사도세자를 포기해야 자기가 살고,친정도 살고,그러므로써 아들 정조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문화재청 발행 조선왕릉 가이드북 중에서*)

 

1762년 영조는 나이 28세에 애통하게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뜻의 思悼 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렸고 광무 3년(1899)에 장조로 추존되면서 능호도 융릉이라 높였다.

 

 





융릉(隆陵)은 애초 경기도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었으나 

정조 13년(1789)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이름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현륭원이라고 불렸다가 융릉이라 높였다.

 

 





융릉으로 들어갈 때는 몰랐던 연못이 눈에 띈다.

하늘과 바람이 잿빛이어도 연꽃의 자태는 그대로 고운, 아름다운 이 곳은 곤신지라는 연못이다.

 

 





융릉에서 돌아나와 반대방향의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걸으면 도착하게 되는 건릉(健陵)

 





 

건릉(健陵)은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인 호학군주로서 문화정치를 실행한 정조의 무덤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이자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왕위에 오른 정조의 제 일성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선언이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은 11살 소년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응어리로 남았을 것이다.당쟁의 폐해로 무기력하게 아버지를 잃은 정조는 먼저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신권을 제압해야 했다.그러나 정조는 무력과 권위로 하지 않았다.학문과 논리를 통해 자신의 입지와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학문과 정국운영에 대한 정조의 자신감은 정조 22년(1798) 스스로 자신을 '萬川明月主人翁'(수많은 냇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라 선언한 것에서 절정을 이뤘다.만 곳의 시내 위에 달이 떠 있으나 하늘의 달은 오직 하나이며,달과 시내 사이를 가르는 그 어떤 존재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만민을 비추겠다는 포부를 밝힌지 2년 후인 1800년,정조는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고 조선은 점차 세도정치의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먼 곳에서 사진기로 힘껏 당겨 찍은 건릉의 장명등.

장명등 귀꽃의 문양도,화창을 장식한 문양도 매우 아름답게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 살펴 볼 수 없음이 지극히 안타깝다.

 

 





잠시 건릉의 정자각에서 다리를 펴고 앉아본다.

정조의 건릉도 사도세자의 융릉처럼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 좌우에 박석이 깔려 있다.

능의 전체적인 조성도 융릉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젠 그만 일어나야지 하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서다 다시한번 올려다본 정자각.

정자각공포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아니 미처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실패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예전 어머니의 재봉틀에서 보았던 나무로 된 실패.물론 크기야 엄청 다르겠지만.

정자각 처마기둥에 달린 실패같이 생긴 물건의 쓰임새는?

이곳 정자각에서 제를 올릴 때 햇볕을 가리거나 혹은 비.바람을 막으려 휘장을 친다면

그 휘장을 올리고 내리고 할 때 쓰는 도르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했던 정조임금.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고 소외받던 남인과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서북인(西北人)을 채용하였으며, 서인(庶人)도 기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고,특히 남인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을 크게 발전시킨 정조.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정조대왕이라 존칭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에이~ 무슨 사진을 찍으신다고~ 그만두세요~"

들어갈 때 받았던 부채를 돌려주며 고마운 맘에 사진이나 한장 찍어드리겠다는 나를 보더니

고개 흔들며 손사래치는 아저씨를 급하게 사진기에 담느라 몹시 흔들렸다.

 

입장할 때 매표소에 입장권을 내미니 아저씨께서 부채하나를 건네 주셨다.

"오늘 이곳에 유난히 날파리가 많네요.부채 하나 드릴터이니 가지고 가세요.나가실때는 꼭 돌려주시구요~"

 

아니 날파리가 얼마나 많기에 매표소에서 부채를 나눠준다냐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건네 준 것이니 받아 들고 다녔는데

정말 부채가 없었더라면 사진은 커녕 눈 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을 만큼 날파리는 많았고

또 날파리의 극성은 도가 넘는 지경이었다.

눅지근하고 바람없는 날씨라서 그런가.아니면 날파리가 유독 이곳 융건릉에만 많은 것인가...

매표소에서 주의를 줄 만큼 날파리가 많으니 입장하는 사람 모두에게 부채를 나눠준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나 이외의 입장객들은 부채를 받지 않았는지 모두 종이나 손수건으로 날파리들을 쫒기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부채가 부족하였나...

와~ 조그만 플라스틱 부채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매표소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날마다 소독약을 치는데도 날파리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부채를 건네주셨던 융건릉 매표소아저씨께 고마운 맘 전한다.

 





 

화성의 세 번째 답사처인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태극기 게양대가 있는 붉은 벽돌건물이 관항노인회관이다.

이 회관 뒷편 밭가운데 관항리삼층탑이 있다고 한다.

 

엄마가 보고싶어 울먹울먹하는 아이의 표정같이 하늘은 금새라도 소나기 한줄기 퍼부을 기세다.

 

 





탑으로 올라가는 길인가.

노인회관 건물 뒷편으로는 사람들 발길이 잦지 않은 듯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얼기설기 만들어져 있다.

옳지 저 위쪽으로 올라가면 탑이 있으렸다.

 





 

관항리 노인회관 뒷편 언덕으로 올라왔다.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보아도 탑은 보이지 않는다.

논둑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가보아도 탑은 그림자도 없다.

 

다시 내려가 노인회관에서 물어봐야 하려나...

 

 





어이구~ 눈썰미도 깡통이지.우째 스쳐지나가면서 탑 냄새도 맡지 못했을꼬~~

노인회관의 건물 바로 옆쪽에 이렇듯 음전하게 탑이 있는데 그걸 보지 못하고 지나쳐 논둑만 뒤지고 다녔으니.

참 나도 말릴 수 없는 헐랭이다.

 

화성 관항리삼층석탑(官項里三層石塔)은 척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듯이 비지정문화재다.

수습된 탑의 부재들을 모아서 새로 만든 얼빵해 보이는 탑.

 

 





관항리탑은 커다란 연꽃잎이 새겨진 하대석위에 팔각기단중석이 있는데 마치 석등의 대석같은 느낌이 든다.

기단 중석 위에는 사각의 기단갑석이 놓여져 있다.

이 탑을 처음 본 순간,기대잔뜩하고 찾아 온 것은 아니지만 맥이 빠졌다.

 

노인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서 만난 이마을의 어르신들은

이 탑의 내력은 전혀 모르지만 이곳이 탑의 원래자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했다.

 

 





노인회관 건물의 계단 옆에 민망한 듯 걸려 있는 표지판.

오래전부터 이 고을에 탑이 있었기에,

온전치 못한 모습이지만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이 마을 이름이 탑산동인가보다.

 

 





 화성시의 네 번째 답사처로 찾은 곳

경기 화성시 북양동 642 봉림사.

화성시 북양동의 봉림사를 찾아 들어가는 진입로는 무슨무슨 공장이 참 많았다.

남양주의 광해군묘를 찾아가는 길을 연상케 할 만큼.

분명예전엔 그렇지 않았을 터인데.

 

 

 





비봉산 봉림사.

봉림사를 품고 있는 산이 비봉산인가보다.

 

 





봉림사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근래에 들어 세운 것인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천왕문엔 천왕상이 없었고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지 천왕문 근처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절 마당에 들려면 천왕문 옆길을 따라 구불거리는 작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봉림사 주차장은 절집마당 턱 아래에 있다.

자동차에서 내리니 후텁지근한 바람에 섞인 자잘한 빗방울이 이마를 스친다.

 

 





으리번쩍한 이층누각이 범종각과 사천왕문이다.

범종각 앞쪽의 거대한 석상들이 어째 불친절한 느낌이 들게한다.너무 거해서 그런가.

 

 





범종각과 어깨를 기댄 담장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듯한데 그 시멘트 벽에 그려진 벽화가 이채롭다. 

여느 절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인데

이 벽화로 인하여 거만해보이는 범종각과 범종각 앞의 석상에서 받았던 불친절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범종각 아래를 통과하면 빤히 극락전이 보인다.

 





 

비봉산에 기댄 절집 봉림사.

사역은 넓었지만 전각은 조촐하다.

근래에 조성한 삼층탑이 휑한 절마당을 지키고 있다.

 

 





봉림사 극락전.

오늘 이곳 봉림사를 찾은 까닭은 봉림사 극락전에 모셔진 불상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봉림사목아미타불좌상(鳳林寺木阿彌陀佛坐像)은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1년(1362)을 하한으로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금칠을 한 불상이라 목불이라는 느낌이 쉽게 닿지 않는다.

 

 





봉림사 극락전 불상 오른편 벽에 걸린 불화.

검은 바탕에 금칠로 그려진 이런 불화를 나는 좋아한다.

블화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문외한이라해도 느낌이 좋다는 것은 말 할 수 있다.

 

 





봉림사 극락전 왼편 축대위를 환하게 밝힌 배롱꽃.흔히 보는 붉은 배롱꽃이 아니다.

아찔하게 멀미나도록 붉은 빛깔로 팔월을 표현하는 남도의 배롱꽃보다 운치는 더하다.

 

 





극락전 오른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이렇듯 붉은 기둥이 요상한 구조물이 있어 다가가 보았다.

 

 





샘.

샘이었다.

맑고 시원한 물이 졸졸 흐르는 샘.

시원하게 한 모금.

 

 





물이 항시 흐르는 샘 근처엔 이렇듯 수생식물이 고운 꽃을 피워 주변을 초록과 노랑으로 덮고 있다.

개구리밥인가?

 

 





크지 않은 경내를 한바퀴 휘돌아보고 다시 범종각으로 향한다.

저 범종각 아래 계단을 내려가 그만 돌아가려구.

 

 





에헤~ 팔월 한 낮 절집 견공의 팔자가 상팔자다.

봉림사 절집의 견공은 무심무념의 상태로 한낮을 즐기고 있었다.

녀석~

 

 





신라 진덕여왕(647~653)때 고구려와 백제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새가 절 근처의 숲 속에 날아들어 봉림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 절집 봉림사.

 

자리잡은 터 넓직하나 전각 조촐하여 일견 쇠락한 감이 느껴지는 절집.

 

 





좁지만 잘 닦여진 길을 따라 돌아가는 길.

봉림사에 들면서 보았던 일주문의 뒤태가 빼따닥해 보인다.

눈이 마음을 따라가진 못한다.

삐따닥한 것을 가지런하게 보는 것도 마음의 몫인데...난 아직 마음이 삐따닥한가보다.

 

 





고향의 봄길...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동요의 제목인 고향의 봄?

도로이름으로는 참 생소하게 느껴지는데,고향의 봄이라고 도로를 명명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순순하게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에서 유래해서 지었다고 생각해본다.

고향의 봄은 아동문학가 이원수님의 작품인데

이원수님의 고향은  경남 양산이라고 알고 있으니 이곳 화성과는 거리가 멀고

그렇다면 고향의 봄이란 동요의 작곡가와 상관이 있을까?

동요 고향의 봄 작곡가는 홍난파라고 알고 있는데 내 몹쓸 기억력을 믿지 못하겠으니

집에가서 다시 찾아봐야겠다.

 

〈봉선화>.〈성불사의 밤>.〈옛동산에 올라〉.〈고향의 봄〉.〈고향 생각〉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에 대해 집에 돌아와 찾아보았더니 맞았다.

고향의 봄이란 동요를 작곡한 사람이 홍난파였고 홍난파는 화성출신이었다.

 

효행길을 통하여 화성답사를 시작하였고 고향의 봄길을 지나 화성답사를 마쳤다.

(답사를 떠나며 챙겼던 자료에는 남양향교와 남이장군묘도 있었는데,남양향교는 번지수대로 찾아갔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남이장군묘는 후드득대며 자동차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답사.여행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불쌍한 당간지주.  (0) 2010.08.27
화성 용주사 돌아보기   (0) 2010.08.26
충북 옥천답사 한나절.  (0) 2010.08.08
보호전각이 꼭 필요했는지.  (0) 2010.07.14
창녕 관룡사 돌아보기.경남 창녕  (0) 201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