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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전북 완주 본문

☆~ 절집.절터/전 북

완주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전북 완주

푸른새벽* 2011. 6. 10. 21:34

 

 






 






 






 






 











 

 











 

 






 






 






 






 






 






 











 

 






 











 

 






 






 

불명산화암사(佛明山 花巖寺)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


절은 고산현(高山縣)북쪽 불명산(佛明山)속에 있다.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 지 오래다.비록 나무하는 아이,사냥하는 사나이라 할지라도 이르기 어렵다.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골골의 계곡물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닿는다.(절이 들어선)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곳이다.


15세기에 씌여진 「화암사중창기花巖寺重創記」에 묘사된 길과 절의 모습이다.시절이 하수상하여 요즘에는 산천조차 날로 달라지고 달로 바뀌는 게 예사지만 화암사가 가는 길은 옛모습 그대로다.오르내리는 사람이 간신히 몸을 비켜설 만큼 점점 좁아드는 바위골짜기,그 흔한 중장비조차 접근을 허용치 않는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에 반천년 전 사람들이 걷던 길을 고스란히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예와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다.물이 느는 계절에는 폭포로 변하는 '수십 길 바위벼랑'이 통행에 너무나 힘이 들었던지 1983년에 그 위로 철제 계단을 놓았다.영혼을 팔아 편리를 산 셈이라고나 할까.두 발을 재겨디디며 이따금 손까지 동원해야 오를 수 있는 옛길을 택하든 아니면 차갑고 무표정한 철제 계단을 택하든 그 끝에서 우리는 하나로 만난다.그리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다시 한 구비를 돌면 거기 작은 성城처럼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에는 문이 없다.옛 절이라면 어느 절에나 있게 마련인 일주문이 여기에는 없다.사천왕문,금강문,해탈문,불이문...,그 어떤 문도 없다.이런저런 문을 세울 여백도 마땅치 않았겠지만,그보다는 진입 공간이 충분히 드라마틱하여 굳이 문들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리라.그래 그런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도 하나도 이상치 않다.굳이 인공적 장치가 아니라도 우리는 그저 옛길이 인도하는대로 걸으면서 '절로 가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차원 높은 구조가 거기에 숨어 잇는 것이다.과정이 생략된 채 단숨에 중심에 다가서는 그런 구조이지만,실은 아무것도 생략된 것이 없는 미묘한 진입부를 화암사는 보여준다.


문 하나 통과하지 않고 중심까지 육박이 가능하다고 해서 화암사가 녹록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절은 아니다.도리어 그 반대.8백여 평 대지위에 여덟 채의 건물이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절이지만 단단한 짜임새,견고한 외양으로 내부를 감춘 채 길손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대체로 절집 누각 건물은 개방적이다.누각 아래는 기둥만을 세운 다음 가운데 칸을 안마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연계하여 통로로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다.위층의 경우에도 벽체 없이 기둥만을 둘러 내부 공간을 시원스럽게 틔워둔다.아니면 벽체를 만들더라도 흙벽에 비해 차단성이 덜한 널벽을 세우고,그마저도 널찍한 문얼굴이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한다.여기에 칸칸이 문을 달되 주로 들어열개를 설치하여 자연과의 소통을 극대화시킨다.요컨대 우리네 전통건축의 기본 특성이기도 한 두드러진 공간환원성이 절집 누각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화암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산문이 하나도 없는 화암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건물이 누각인 우화루(雨花樓)이다.'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보통의 누각처럼 개방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아래층은 앞쪽에만 한 줄로 기둥을 세웠다.그리고 중간 또는 뒷줄의 기둥이 서야 할 자리에는 막돌을 차곡차곡 맞물려 축대를 쌓았다.따라서 누각 아래는 전체가 벽처럼 막혀버린 구조로 산지가람에서 흔히 채택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위층도 앞면은 널벽을 시설하고 칸마다 바라지창을 달았지만,창의 크기가 집의 규모에 비해 작은 편이다.그나마 창마저 널문이라서 창이 닫힌 상태에서는 오히려 폐쇄적인 느낌이 강하다.


우화루 아래에서 시작된 축대는 꺾어지고 이어지면서 좌우로 펼쳐진다.오른쪽 축대는 얼마 안가 산자락에 파묻히면서 끝이 나고 왼쪽의 그것은 커다란 암반에 이어지면서 다한다.여기에 왼쪽 축대 위로는 돌각담이 나란히 달리다가 암반 위로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절 뒤편까지 계속 된다.그리고 돌담 너머로는 건물의 지붕들만이 떠보여 자못 깊이 감을 자아낸다.(중략)


골짜기는 언덕으로 이어진다.그 언덕을 오르면 화암사의 내력이 적힌 화암사 중창비(花巖寺重創記)가 서 있다.몸돌의 높이 1.3m,받침을 포함해도 1.7m가 채 안되는 작은 대리석 비이다.비갓 없이 비머리를 둥글게 다듬었다.비문은 정통 신유(正統 辛酉.1441)년에 지었지만,비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융경(隆慶) 6년(1572)이다.아마도 문서 형태로 보존해오던 중창기를 어떤 계기로 이때 비석에 새긴 듯하다.글을 지은 이는 형조(刑曹)의 도관정랑(都官正郞)이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는 것까지만 알 수 있을 뿐 이름은 판독이 되지 않으며,글씨 쓴 이가 누구인지 아예 밝히지도 않았다.중창비는 15세기 이전 화암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에 해당한다.중창비의 내용,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上樑文).묵서명(墨書銘),그밖의 몇 가지 기록을 뒤지면서 화암사의 옛 자취를 대충 되밟을 수 있다.
화암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삼국시대 말기쯤인 듯하다.


예전 신라의 원효,의상 두 조사(祖師)가 중국과 인도를 유력(遊歷)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은 의상스님이 도솔천(兜率天)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등신대의 원불(願佛)이다.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臺)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元曉臺)라 하고,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義相庵)이라 하는데,모두가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중창비의 한 구절이다.원효스님이 중국에 갔었다거나 의상스님이 인도까지 다녀왔다는 내용 등은 사실(史實)과 다르다.그러나 나머지 내용은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적어도 조선 전기 까지는 의상스님 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관음상이 남아 있던 것이 틀림없는 듯하고,의상암은 15세기에는 물론 한국전쟁 와중에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엄연히 존재했다 한다.그러므로 화암사가 원효대사와 의상 스님 무렵에 개산되엇거나 그 이전부터 이미 존립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도리어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신라에 의한 통일 전이라면 이곳이 백제 영토였을 텐데 어떻게 신라계 사찰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혹시 백제 영토 안에 거점을 확보하려는 신라 측의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된 절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겠다.그러나 그보다는 의상이나 원효 이전에 백제인들에 의해 세워진 절이 신라세력이 밀려들면서 주도권이 바뀐 것으로 봄이 어떨까 한다.뒤의 극락전 설명에 나오듯이 현재의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백제적 전통도 이를 뒷받침 하는 하나의 예가 되겠다.


이렇게 창건은 되었지만 화암사가 거창한 절로 이름을 떨친 적은 별로 없었지 싶다.무엇보다 큰 절이 들어설 수 없는 지형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그렇지만 세속과 절연된 산사다운 품,들목에 전개되는 오밀조밀한 가경(佳景) 때문에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리기는 했던 모양이다.고려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백문절(白文節.?~1282)은 화암사를 읊은 7언 40구의 긴 한시(漢詩)를 남기고 있다.그 시에 "계곡에 가로 걸린 작은 정자엔 온 벽에 하나 가득 시가 걸리고(跨溪小亭滿壁詩)"하는 구절이 있다.이로 미루어본다면 그가 생존했던 때 이전에도 많은 시인가객들이 여기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그뒤 어느때부터인가 절이 차름 퇴락했는지 대덕연간(大德年間,1297~1307)에 달생(達生)이라는 인물이 화주가 되어 절을 중창한다.그리고 120여 년 뒤,아주 기이하게도 이름이 같은 성달생(成達生,1376~1444)에 의해 화암사는 대대적인 중창을 보게 된다.그는 2품 벼슬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낸 무신으로 원찰(願刹)을 삼을 목적으로 시주를 자청하여 1425년에 불사를 일으킨다.1429년에는 딸을 직접 절에 보내 일의 추이를 살피게끔 하였다.그때 예전 중창주와 자신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오늘날 장상(將相)의 지위에 오르고 부귀를 누림이 전생에 착한 공덕의 씨를 심은 까닭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더 많은 재물을 보시하여 꾸준히 일을 진행시킨다. 그리하여 역사(役事)는 1440년에야 끝을 보게 된다. 이때의 중창은 긴 기간 만큼 절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규모였던 것 같다. 불전(佛殿)은 극히 장려하였으며,그밖에 선승당,조성전,여러 요사는 물론 부엌,수각,측간까지 이전보다 크고 넓게 고쳤다고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화암사의 골격이 이 무렵에 갖추어진 듯하다.


임진왜란은 산중의 작은 절에도 어김없이 깊은 상처를 안겼다.1597년,왜병의 침입으로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불에 타는 재난을 당했다.극락전은 1605ㄴ녀부터 그 이듬해까지,우화루는 1611년에 예전의 모습대로 복구되었다.그리고 예닐곱 차례의 중건(重建).중수(重修)를 거치면서 화암사는 오늘에 이른다.절 모습처럼 화려한 각광을 받은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조촐한 매무새를 아주 잃어버린 때도 없는 잔잔한 자취이다.


중창비를 뒤로 하고 서편 산등성이로 오르면 그대로 널찍한 바윗등이다.여기에 앉아 남쪽을 향하면 중중한 산이 눈에 가득 담긴다.동에서 서로,서에서 동으로 뻗으면서 골찌기와 능선이 겹겹이 포개진다.한 겹씩 멀어질수록 산은 평면에 가까워지면서 윤곽선만을 남기고,그 빛깔은 갈수록 아련히 깊어진다.글쎄,수묵화에서 이런 빛깔과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까? 화암사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조용한 경치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


화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의 기록인 「화암사중창비문」에 따르면 신라시대인 7세기 경 원효(元曉)ㆍ의상(義湘) 두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중창비에 전하는 창건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의 원효와 의상 두 조사께서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도를 얻고 귀국하여 이곳에 주석하였다. (두 분은) 사찰을 짓고 머물렀는데, 절 법당의 주불인 수월자용(水月姿容) 보살은 의상스님이 도솔산에 수행하러 갔다가 친견했던 지용과 등신(等身)으로 조성한 원불(願佛)이었다. 절의 동쪽 고개에는 원효대(元曉臺)라는 법당이 있고 절의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모두 두 분 조사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다….

 
비문의 내용처럼 화암사는 당시 원효ㆍ의상 스님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고, 사찰 동쪽과 남쪽 고개에 원효대와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 역시 찾기 힘드나 고려시대에 문인 백문절(白文節, ?-1282)이 이곳에 들린 후 남긴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여, 고려 말에도 화암사에 법등이 이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초기인 1425(세종 7)에 와서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이 절터만 남아 있던 이곳을 자신의 원찰로 삼기 위해 중창하였으며, 이때 해총(海聰) 스님 등이 불사를 주관하였다. 화암사중창비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441년(세종 23)에 성달생이 써놓은 글로서, 그 후 130여 년이 지난 1572년(선조 5)에 비가 건립된 것이다.


1440년(세종 22)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성징(性澄) 스님이 3번째 중창을 하였고, 1629년(인조 7)의 4창(創) 후 1666년(현종 7) 영혜(靈惠) 스님에 의한 5창이 있었으며, 1711년(숙종 37)에 다시 6창한 후 극락전상량문을 지었다. 1830년(순조 30)에 명부전 지장시왕탱, 1835년(헌종 1)에 산신각 산신탱을 조성하였으며, 1858년(철종 9)에 의상암의 신중탱을 조성하였는데 의상암이 없어지면서 극락전 내부로 옮겨 봉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각 시왕탱을 조성하였다. 1871년(고종 8)에 극락전 현왕탱, 1917년에 극락전의 칠성탱 및 괘불을 조성하는 등 19세기에서 20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사찰의 불화를 새롭게 단장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1981년ㆍ2002년에 각각 노후한 극락전을 해체 보수하였고, 1982년에 산신각의 산신탱을 조성하여 현재의 가람으로 정비하였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