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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안심사(安心寺).전북 완주 본문

☆~ 절집.절터/전 북

완주 안심사(安心寺).전북 완주

푸른새벽* 2011. 6. 15. 20:54

 






 

 






 






 






 






 











 

 











 

 






 






 






 






 






 

완주 안심사(安心寺)


전북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26


안심사의 연혁은 상세히 전하는 바가 없다.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다. 조구(祖求)라는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638년(선덕여왕 7)에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이 모두 <안심사사적비>에 수록되어 있는데 약간의 혼돈이 따른다. <안심사사적비>는 처음 김석주(김석주, 1634 - 1684)에 의해 비문 내용이 편찬되었으나, 비가 세워지지는 못하다가 1759년(영조 35)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내에 건립되었는데, 이 때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므로써 창건역사에 대한 혼돈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875년 (현강왕 1)에 도선국사가 중창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조구가 중창하였다. 그 뒤 1601년(선조34)에 수천의 중창을 거쳐 1710년(숙종 36)에는 신열이 중건하였다. 이 절의 사적비는 1759년(영조 35)에 세워졌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 안심사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등 30여개의 당우와 석대암, 문수전 등 12개의 암자가 부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절의 부도전은 1759년에 중건되었는데, 이 부도전은 옛날부터 안심사에 전해 내려오던 부처님의 치아1개와 사리 10과를 봉안하기 위하여 명응이 시주를 받아 5개월에 걸쳐서 세운 것이다. 이 전각을 건립할 때 세조가 직접 글씨를 써서 보냈는데 이 글씨를 보관하기 위한 어서각도 함께 건립되었다. 그러나 6.25사변 때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는 옛 자취를 알게 하는 유적과 소규모의 인법당만이 남아 있다.


안심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세워져 있던 거찰이었는데, 이제 그 번성했던 사찰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고 불에 타다 남은 석재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658판의 한글경판이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두 불타버렸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옛 대웅전 건물을 중수하려는 등의 중창불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적광전과 요사는 이미 얼마 전 신축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보석사의 말사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안심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다. 조구라는 스님이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지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그것인데, 이 두 가지 설이 모두 「안심사사적비」라는 동일한 자료에 수록 된 내용이어서 약간의 혼돈이 따른다. 즉 「안심사사적비」는 처음 김석주(1634~1684)에 의해 비문 내용이 편찬되었으나, 비가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가 1795년(영조 35)에 이르러서야 경내에 건립되었는데 , 이 때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므로써 창건 역사에 대한 혼돈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다만 1759년까지의 역사는 「안심사사적비」에 의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이후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자료는 거의 전무한 실절이다.
*한국전통사찰정보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