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울산 운흥사터(雲興寺址)돌아보기.울산광역시 본문

답사.여행 후기

울산 운흥사터(雲興寺址)돌아보기.울산광역시

푸른새벽* 2016. 2. 14. 20:53

 

울산 답사 둘째날.오전 11시 반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 산 218번지

운흥사지부도를 만나러 왔다.

 

고즈넉한 자리에 부도만 달랑 있는 줄 알았더니 운흥사지 부도는

꽤 큰 절집 시적사 경내 그야말로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대웅보전 옆 높은 석축 위에 모셔져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모두 일곱기의 부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시적사 마당에 있는 두 기라고 하며

시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것이다.

 

부도는 크기만 서로 다를 뿐 거의 비슷한 모양새로 바닥돌 위로 2단의 기단(基壇)을 놓고 그 위로 종모양의 탑몸돌을 얹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꽃무늬가 새겨진것도,몸돌 윗부분의 장식도 다르다.

 

 

 

 

 

운흥사지 부도는 시적사 높다란 축대위에서 의연하게 저 건너편의, 장대하지만 창백한 새 부도를 바라보며

지금도 세월을 헤아리고 있지 싶다.

 

시적사(施寂寺)

절집 이름으로는 참 생소하다 생각하며

마당의 부도를 돌아보고 운흥사 금당터에 있다는 부도를 살피려 걸음을 재촉하는데

시적사의 처사로 보이는 분이 무언가를 들고 우리 일행곁으로 왔는데 그의 손에는 제법 많은 양의 떡과 과일이 들려있었다.

 

"방금 祭를 지냈는데 조금이라도 나누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모두 떡과 과일 한조각씩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말랑하고 쫄깃한 떡 한 조각으로 우리는 시적사의 넉넉한 인심을 실감했고 충분히 행복했다.

 

 

 

 

 

또 다른 운흥사지 부도를 찾아 가는 길은

사그락거리는 소리와는 달리 더없이 보드라운 낙엽들이 깔려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로 난 흙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왼편으로 대나무밭을 정리해 만든 듯 싶은 운흥사지 부도밭이 있다.

이곳이 예전 운흥사의 금당터라지.

 

 

 

 

 

 

운흥사에는 원래 모두 7기의 부도가 있었다는데...

시적사에 모셔져 있는 부도 2기와 이곳 부도밭에 4기가 있어 모두 7기라던 자료와는 달리 나머지 1기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도 시적사 마당에 있는 부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도 옆 투박한 모양새의 석조수조에는 영조 7년에 조성됐다는 명문이 씌어 있다고 하는데 난 왜 보지 못했을까?

 

 

 

 

 

핑계를 대자면 모두 이 석조물 때문이었다.

네 면에 골고루 베풀어진 이 멋진 조각들에 홀려 부도나 수조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석조물의 용도는 뭐지?

그 물음을 깔끔하게 해결해 준 사람은 역시 옛님카페의 달넘새님(우린 달넘새님에게서 답사때마다 한가지씩 배운다.ㅎ)

 

한마디로 이 석조물의 용도는 부도의 기단부 지대석이란다.

나라안 여러곳에 산재한 부도의 예를 들어가며 변천과정을 설명해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또 하나 배우고 익히게 되었음이 고맙고 고마웠다.

 

그가 카페에 게시한 많은 자료를 모두 이곳에 옮겨 올 수는 없기에 달넘새님의 마지막 정리글을 옮겨본다.

'경주 원원사지 서부도는 운흥사지 큰 부도에는 없는 복련이 3단의 지대석 중 2단의 지대석 위에도 조식되어 있어 지대석만 본다면 장식적으로 더 두드러져 있다.장식이 두드러질수록 선행양식이라는데 위안을 삼아본다.

 

경주 외동 원원사지 서부도(17세기 중후반),운흥사지 큰 부도(17세기 후반),청송사지 제일 큰 부도(17세기 후반),청송사지 신흡대사부도(18세기 초반)의 흐름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가 희귀한 경남자락에 이러한 부도의 출현은 특이한 일이며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며 답사객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답사기를 쓰면서 부도의 변천과정을 피력한 게시글을 발견하고 찬찬히 읽어보니 예시한 부도가 15기 정도.

그 중 경기도 광주의 백련암부도.

2010년 5월 3일,어렵사리 찾아갔던 기억은 있어도 그 부도의 모양새는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찾아보니 사진은 정확하게 여러 각도로 잘 찍었고 저장해 놓은게 꽤 많이 있었다.

지금보니 지대석 기단부가 그렇게 아름답고 또 특별했었는데 왜 난 그때 그런 의문을 갖지 못했을까?

 

아 ! 맞다.

바로 전에 돌아 본 청송사지의 신흡대사 부도와 그 옆의 커다란 부도에서도 분명히 봤다.

한심하고 한심한지고...

도대체 뭘보고 뭘 느낀건지.

 

이래서 단체답사를 손꼽아 기다리는데 행여 달넘새님이 불참하게 되면 서운하기 이를데없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다.

 

 

 

 

 

부도 지대석 각 면에 베풀어진 아름다운 문양들.

 

 

 

 

 

금당터와는 조금 떨어진 곳,예전 번창했다던 운흥사의 사역을 살펴 볼 수 있는 운흥사지로 향한다.

겨울 갈수기라 그저 졸졸 흐르는 개천에 불과해 보이는 이곳이 바로 운흥동천인가?

 

 

 

 

 

운흥사지 입구에 보란듯 세워져 있는 운흥사지 안내판.

어제 오늘 다녀온 다른 절터의 안내판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엔 이렇게 친절하게 가람의 배치도가 표시되어 있어 운흥사지를 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안내판엔 금당지가 오른편 가장 위쪽에 있는데 방금전 다녀온 부도 네 기.석조수조.부도 지대석의 기단부가 있던 곳이 금당지라고 했으니

지금 도착한 곳은 그 아래쪽이 되는 것인가?

여럿이 함께 빨리빨리 다니는 단체답사에선 이게 탈이다.

어디가 어딘지,어느방향으로 가는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으니.

 

한국사지총람의 자료에 따르면

'운흥사지는 양산시와 울주군의 경계에 있는 정족산에 위치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券22  慶尙道 蔚山郡 佛宇 條에는 '

圓寂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鶴城誌』와 『蔚山邑誌』등에 신라 26대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정확하지는 않다.고려 말 지고오하상이 공민왕에게 건의하여 중건을 하였으나,임진왜란 때 일부 불탔고,이 후 120년 뒤인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세웠다.하지만 『梵宇攷』에'今廢'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19세기 전에 이미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지는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고,창원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하였다.조사결과 금당지를 비롯한 온돌 건물지,수조 등의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유구로는 정족산 중턱의 운흥골에 있는 승탑이 있다.총 7기가 있었는데 현재는 6기만이 확인된다.이 중 2기는 施寂寺로 이건되었다.'고 한다.

 

 

 

 

 

 

정말 확연한 폐사지구나 !

발굴이 되어 가지런히 정리되었거나 발굴을 위하여 덮개를 덮어 놓았거나 혹은 구획을 지어 표식을 해 놓은 폐사지보다 이런 풍경이 참 좋다.

 

강진의 월남사터도 내가 좋아하는 폐사지 중 한 곳이라 서너번 발걸음했는데

재작년 겨울에 찾아 갔을 때 그곳은 곳곳이 발굴과 정리작업을 위해 파헤쳐지고 부분 부분은 푸른 비닐로 덮여 있었다.

월남사지가 얼마나 확실하게 발굴되고 정리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후로는 내가 좋아했던 그런 폐사지의 허전한 여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돌아오는 발걸음이 괜시리 허탈했었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수 있는 허탈한 여유가 있는 운흥사지도 언제 어떻게 또 변할지는 모르겠다.

 

 

 

 

 

정비되지 않은? 정비하지 않은?

고사한 나무 몇 그루와 무너진 석축.덩그라니 남은 석조...

석탑의 부재나 혹은 건물의 주초라도 남아 있는 여느 폐사지와는 달리 무너진 석축과 석조 하나 뿐인 운흥사지

번성했을 때는 50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릴 만큼 큰 절집이었는게 더 허망하다.

 

탑의 부재나 건물의 석조부재들은 저 아래 부도밭에 모아 놓았는데

왜 저 석조는 옮겨 놓지 않았을까가 이상하다.

 

운흥사지는 그야말로 폐사지란 바로 이런 풍경이란걸 고스란히 모두 내 보이고 있었다.

 

 

 

 

 

운흥사지를 돌아보는 눈썰미도 제각각이다.

석조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무너진 석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또 절터의 나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

나는 어느쪽이었나?

 

 

 

 

 

겨울,말라 시들어버린 잡풀들과 나뒹구는 석축의 일부분.

이런 건조한 폐사지의 풍경이라도 초록의 계절이라면 훨씬 보드랍겠지.

 

 

 

 

 

 

고사한 듯한 감나무에 매달린 경고문.

판자를 고정시킨 못이 녹슨것을 보니 아마도 오래전에 매달아 놓은것 같은데

'아무리 폐사지라해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에 더불어

 

"절집 없어지고 스님도 떠났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지금도 부처님의 온기가 가득한데

네것이 아닌 저 감나무에 달린 감 하나 때문에 생명이 살아 숨쉬는 나무 몸통에 대 못을 2개나 박아야 했는지.

이자리에 지금도 살아 쉼쉬는 감나무의 몸통에 대못을 박은 놈..." 이라고 한탄을 한 사람도 있고

 

"오죽하면 이랬을까.아무리 인심이 사납기로서니 감 몇 개 따간다고 이러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사람들.

 

나는?

 

 

 

 

 

그래,

한가지라도 더 살펴보려고,하나라도 더 눈에 익히려 동분서주하는 것 보다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 폐사지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이전에 번창했었을 절집의 역사와 또 폐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내력을 생각해보는게

바로 폐사지에서의 예의지.ㅎ

 

 

 

 

 

 

 

 

겨울이라는 계절과 시든 잡풀들과 무너진 석축과 석축을 이루었을 돌들이 여기저기 널려 허망함을 더하는 운흥사 터.

조선시대에 경판 간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각종 불경을 간행하였고
그때의 경판은 현재 양산 통도사 성보 박물관에 16종 673점이 남아 있다는 운흥사.

옛날엔 널리 유명했고 절집도 무궁하게 넓었다는 그런 예전의 영화는 누구나 말 할 수 있을 뿐더러

폐사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금 현재는 허허한 그냥 폐사지일 뿐인 운흥사지.

 

발굴과 정리를 마치고 평평한 대지에 탑도 우뚝하고 각종 유물들이 즐비한 그런 폐사지와는 다른 곳.

그래서 폐사지라는 명칭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한 곳.

흐리고 바람부는 겨울이었지만 그래도 눈발이라도 날렸으면 더 좋았을 운흥사지.

 

무언가 두고 가는 듯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곳.

울산답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