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처럼 떠나다

경북 영양 돌아보기 2(2016년 11월 20일) 본문

답사.여행 후기

경북 영양 돌아보기 2(2016년 11월 20일)

푸른새벽* 2016. 12. 4. 23:35

또 낯선곳에서의 하룻밤이 지났다.

숙소는 깨끗했고 여성 넷이 지내기엔 넉넉한 이부자리와 넓은 공간에서 따뜻하게 잘 자고 일어났다.

실내가 너무 건조해 목 상태가 좋지 않은것만 빼면.


지난번 원주답사에서 한 여성회원이 준비해 온 드립커피에 감동했었는데 커피를 준비했던 그 여성회원이 이번 영양답사에 불참이라

내심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았으나 "큰 말이 나가면 작은말이 큰 말 노릇한다"는 속담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함께 방을 사용한 대구에서 온,카페 가입한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 여성회원이 거짓말같이 드립커피를 준비 해 온 것이다.


내가 자고난 이부자리를 채 정리하기도 전에 그 여성회원은 말갛고 그윽한 드립커피를 내려 큰 잔에 담아 건넸고

나는 원주답사의 아침처럼 그윽한 향기와 감동을 다시 한번 받았다.





아침은 언제나 그렇듯 상쾌하다.

오늘도 만나볼 옛님에 대한 설레임으로 시작.






아침 여덟시.

우리는 숙소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식사의 메뉴는 파김치.배추김치.버섯볶음에 더해 두어가지 더 있었고 북어국까지.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영양에코그린센터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아주머니들은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자원봉사차원이라했다.

어제 저녁식사와 오늘 아침식사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에코그린센터의 시설이나 관리가 잘되고 못되고나 청결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의 지독한 불친절이었다.


음식물쓰레기 문제만해도 그렇다.

우리는 너남없이 음식쓰레기 문제는 심각하여 가급적이면 먹을 만큼만 조리하고 조리한 음식은 따로 덜어 먹도록 하며 

자신 몫으로 덜어 온 음식은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거 잘 알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문제는 국가의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노동력손실로 이어지는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것에 동의하며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는 통은 따로 없으니 알아서 하세요" 라는 퉁명스러운 말을 식사내내 반복함에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마치 말 안듯는 세살배기에게 훈시하듯 하니 도대체 사람들을 뭘로 보고?

같은 말이라도

"아직 시설이 완벽하지 않아 음식물 쓰레기 처리가 곤란하니 가급적이면 음식물을 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녁을 먹으면서 그에 대해 불쾌함을 이야기했더니 곁에 있던 일행이 "경상도사람이라서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경상도 사람이라서 그러려니 한다고?

그러면 경상도사람이라서 불친절한건 당연하다는 소리 아닌가.

이런 당치도 않은 이유가...


이곳을 이용했거나 앞으로도 이용할 사람들이 모두 경상도 사람일 수는 없다.

아무리 자원봉사라해도 이곳은 엄연히 댓가를 지불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사용료를 지불하는 이들에게 그 댓가에 맞는 서비스는 부족할지언정 불쾌함을 느끼게 하면 안된다.


작년 홍성답사 때도 이곳과 비슷한데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아침을 먹었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달랐다.

그래서 우리는 식당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고 깎듯함에 감사했다.

경상도와 충청도라는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내방객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차이다.

아무리 깨끗하고 시설이 좋아도 난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을 생각은 없다.일하는 분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2016년 11월 20일.

어제와는 다른 빛나는 아침 말간 하늘빛이다.


오전 8시 30분.

영양 수비면의 검마산 휴양림을 찾아 가는 길.






영양 수산유허비(英陽 首山遺墟碑)

검마산 휴양림과는 방향이 다르지만 잠시 들러보기로 한.

수산유허비(碑)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 ∼1674)선생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이 비의 주인인 이시명의 두번 째 부인으로 맞이한 인동장씨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조리서라고 할 수 있는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집필 한 여성이다.






부도를 만나러 휴양림으로 들어간다.


뒷짐을 진 회원 몇이 보인다.

길을 걸을 때,아니 약간의 경사진 길을 오를 때는 뒷짐을 지는게 편하다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휴양림의 아침을 걷는 표정들이 밝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날 옛님에 대한 설레임이 묻어 나는.






주차장에서 잠시 걷다 보면 나타나는 표지판.

우리는 작은 갈래길에서 오른편 방향을 택했다.






원래 검마산 부도들은 이곳에 있었는데 근래에 휴양림을 만들면서 더 위쪽으로 옮겼다고.







3
들판 가운데 서서 불을 질러 보라.
자신이 선 자리에 불을 붙이면
그 순간 타 들어가는 풀과 나무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나는 불이 붙는다.
나를 태우고 빈자리는
불타는 속도만큼 빨리 비워진다.

홀로 남은 자신과 점점 커가는 빈 자리.
이미 타버린 어느 시간의 변방에
빈 소주잔 출렁, 눈물보다 맑은 사랑으로
아픈 유목민이 서 있다.
그는 이미 사랑에 빠졌다.

길 위의 유목민은 말한다.
사랑은 너를 사랑하는 나를
너에게 선물하는 것이라고.
꽃을 선물하는 마음이 꽃보다 아름답듯
마음밭을 자박자박 밟으며 오는 사랑은
한여름에도 소름 돋도록 전율을 준다.
감전의 순간
꽃 새 나무들이 가슴속으로 숲을 만든다.

(신광철/늑대의 사랑)






저기 위쪽 왼편에 보이는 석축위로 부도임직한 것이 보인다.

휴양림이라서 그런지 나무들이 참 좋다.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그 풍경도 참 좋다.






영양 검마산부도군(英陽 劍磨山 浮圖群)

파란 이끼가 그간의 환경과 세월을 알려주는 듯하다.


전에 이 부도와 만났던 이들은 부도의 윗부분 조각이 처녀의 젓가슴 같다느니 농염한 여인네의 것일 것 같다느니 하며

그래서 이 부도는 꼭 이렇게 부도의 윗부분 조각을 한번쯤은 만져보고 쓰다듬어 봐야 한다는 말까지.

여인네들은 딱히 뭐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것 같은데 남정네들은 달랐던가 보다.


검마산부도는 조선 후기의 부도로 여러기가 있었으나 망실되어 지금은 두 기의 석종형부도만 남았는데

혹 이곳에 있었다는 검마사라는 절집의 것은 아닌지. 






역시 다람쥐청년

부도의 주인이 누군지 부도에 새겨진 각자를 찾아내려 배낭에 넣어 온 칫솔을 꺼내 작업을 시작한다.ㅎ

그렇게 열심히 칫솔로 털어내 글씨를 살폈건만 딱 부러지게 알지는 못하였다.일행들 모두.

집에와 자료를 찾아보니 '경파당 우행(京破堂 佑行)' '신계당관하진(神溪堂寬廈珍)' 정도로만 확인된다고.






보기 좋은 그림이다.

활짝 웃는 여인과 듬직한 뒷모습의 남정네와 그에 더하여 아침햇살이 그려내는 나무들의 실루엣.

사실 이런 모습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부부거나 연인이라 생각했을거다.


그런데 각자 가정생활 건강한 우리 답사회원들이니 그런건 전~혀 관계없고

사실 이런 모습도 일부러 등 떠밀어 연출한 것이니까 ㅋㅋ






검마산 휴양림 다음의 답사처인 삼지리모전석탑을 향해 가는 길.

길은 경사가 심하고 좁기까지 한데다 굽이굽이 꼬부라져 자동차가 올라가기가 엄청 어려웠다.

아니 자동차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건 맞지 않고 중형이상의 세단형 자동차가 올라가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나를 포함한 여인네 셋은 사륜구동의 자동차를 타고 다녔기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일은 겪지 않았다.

1박 2일 답사를 다니는 동안 내내 신세진 답사카페의 도리천님께도 감사를~






삼지동전탑은 경관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탑을 만나러 가는 이 길도 운치있어 좋았다.

삐뚤빼뚤한 돌계단.이끼낀 석축과 그림이 그려진 법당의 벽과 또 말간빛 풍판 그리고 오래된 나무들...






언뜻 새송이버섯 이미지가 떠올랐다.

탑은 퉁퉁한 새송이 버섯의 뿌리 부분 같은 석축(?)위에 올라 앉아 있다.






놀랍다.

영양삼지동모전석탑(英陽三池洞模塼石塔)


답사 첫날 첫번째로 만났던 산해리탑과 같은 모전석탑인데 너른 평지를 거느리고 대지위에 뿌리 내린 듯 당당히 선 산해리탑과는 달리

산중턱,커다란 바위를 기단삼아 그 위로 탑신을 올려 놓은 놀라운 모습이다.

원래 3층탑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2층까지만 남아있는데 원래대로 3층의 높이였다면 일견 아슬아슬해 보이기도 했겠다.


자료에는 감실이 있다고 하는데 이쪽은 아니니 다른 방향으로 봐야겠다.






탑의 바로 앞까지 가서 보는 사람도 있더만 나는 탑 앞으로 가기위해 걸어야 하는 좁좁한 그 길이 무서웠다.

그래서 탑 아래쪽 되똑한 계단을 내려가 고개 아프도록 올려다보니 감실이 겨우 보인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 안에서 신라 금동불상 4구가 나왔다고 하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한다.






이렇게 보니 또 탑의 모습이 다르다.

정면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탄탄한 느낌.근사하다~






삼지리모전탑이 있는 곳엔 자그마한 절집이 있는데 '연대암' 과 '영혈사'가 혼용되고 있어

자료를 찾아 살펴보니 이곳은 신라 때 창건한 영혈사가 있었는데 절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다시 중창하여 그 이후 연대암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이곳은 경주와는 좀 떨어진 곳인데 연대암은 불국사의 말사라고 한다.


삼지리탑 아래에서 내려다 본 절집의 지붕위엔 떠나려는 가을의 자취가 아련하다.






연대암 이전 이름 '靈穴寺'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에고~저곳도 잘 살펴볼걸~






작은 건물 기둥에 걸린 영혈산 연대암이란 편액.






탑이 없어도 좋은 산사의 풍경.






삼지리탑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뒤통수가 따갑다.

그건 아쉬움의 다른 표현일 것.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영양군 영양읍 화천리 835 .


예전엔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냥 탑 한기만 우뚝하다.

하긴 사찰이 있었으니까 탑이 있는거겠지.

이 탑이 원래부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게 사실이라면 이곳은 절터임이 분명하다.






보물 제609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양 화천동삼층석탑(英陽 化川洞三層石塔)은 그닥 크지는 않은데 장식이 많아 화려한 느낌이다.

얼핏 양양의 진전사지탑이 생각난다.


화천동삼층석탑은 신라 하대인 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천동삼층석탑 몸돌 네 면에 새겨진 사천왕상.






화천동삼층석탑 기단부의 윗층 기단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인 탱주를 조각하여 한 면석을 둘로 나누고 그 안에 팔부신중을 새겼다






돌 9개를 이어붙인 아래층 기단은 한 면이 면석 셋으로 이루어졌는데 면석마다 안상으로 테를 두르고 그 안에 천의 자락을 화려하게 날리며 춤을 추는 듯한 십이지신상을 새겨놓았다.






화천동삼층석탑이 자리한 곳은 예전의 절터로 사찰의 명칭이나 자세한 연혁은 알려지지 않는다.

탑 부근에는 사찰 건물지의 초석으로 보이는 석조물이 네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는 원좌가 도드라진 것도 보인다.






이 민가는 언제 지어진 것일까.

주차한 자동차로 보아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다.

낡은 기와지붕 뒤에 오래된 나무 한그루라도 있었으면.






화천리탑을 떠나 낮 12시 쯤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찾아 간 영양군청 앞 한울가든.






뭘 먹었는지 지금도 기억에 별로 남는게 없지만 반찬은 가짓수도 많았고 깔끔했는데 딱 하나 돌솥밥이었던것은 확실하다.

음식맛은 그런데로...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우리 일행 모두의 생각은

다 괜찮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찌개류,특히 된장찌개가 없었던 것은 많이 아쉽다고.






영양군청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 일행은 군청으로 향했다.

그곳엔 삼층탑이 있다니까.






영양서부리삼층석탑(英陽西部里三層石塔)

이 탑은 일제강점기 때 옮겨온 것으로 원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제 있던 자리에서 옮겨 온 탑이어서 각 부재의 조합이 불완전해 보이며 각층의 탑신석에는 양 우주(隅柱)가 도드라져 보인다.






서부리삼층탑은 뭐가 잘 못 된지도 모른채 지금까지 지내왔다.

노반이 뒤집어 진.

그나마 다행인것은 뒤집어진 노반이 접착된것이 아니라서 역사적 소명의식 강한 카페지기가 살짝 들어 바르게 놓았다.

왼쪽의 사진은 노반이 뒤집어진 상태이고 오른쪽 사진은 비로소 노반이 바르게 놓인 모습~






서부리탑을 살펴보고, 원래 서부리탑과 같이 군청마당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비석과 척화비가 옮겨진 영양호국공원으로 가기 전.

잠시 들렀던 장소.






술을 만드는,정확히 말해서 막걸리를 만드는 아주 오래된 양조장이라했다.






경상북도의 산업유산으로 지정된 영양막걸리 양조장.


언젠가 충남 홍성답사 때도 우리 답사팀은 그 지역의 막걸리 양조장에 들렀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양조장 문은 닫혀 있었는데 극성맞게 양조장 뒤편의 주인집을 찾아 들어가 양조장 안내와 막걸리맛을 부탁했더랬다.

양조장 주인은 좀 당황하긴 했어도 양조장을 안내했고 막걸리맛도 볼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건 아마도 그 지역에 거주하는 카페회원의 휴민트(Humint) 덕분이라 생각한다.


이번 영양답사에도 그렇게 하려니하고 들어갔는데 의외였다. 

양조장 주인은 우리 일행을 아래위로 훑어 보고는 아무말 없었는데 냉담에 더해 문전박대라 느껴졌다.

이번 답사를 안내하던 영양에 거주하는 우리 회원과 미리 연락이 되지 않았나보다 하고 이해는 했지만

참...기분은 별로 였다.


양조장을 찾아 들어갔던 사람들 중 몇몇은 일인당 막걸리를 열병 정도 구입해 들고 나왔다고 한다.

난,아들이 막걸리를 좋아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양평의 지평막걸리도 전국에 이름 떨치고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6
신을 위한 재단에 바친 꽃이 시들고.
들판에 피었던 꽃이 지고
하늘을 날던 새가 추락하는 이 땅에서
모자라고 쓸쓸한 내 가슴에 기도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게 하소서.
불행한 여인이 손금이 지워지도록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기도한다.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함께함을 감사하는 기도를.

그리고 문득,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사람임에 감사한다.


7
반딧불이 어둠의 징검다리를 깜박이며 건너듯
드문드문 아픔으로 찾아오지만
못 다한 사랑도 아름다워라.

(신광철 / 늑대의 사랑)






영양 군청에 있는 서부리탑을 만나고 영양호국공원으로 옮겨졌다는 척화비와 비석군을 보러왔는데

맑음과 파랑이 더해진 하늘 바탕의 기둥에 매달린 앙징맞은 조형물이 눈부시다.

너무 이쁜 저것의 정체는?






우리 손녀같이 이쁘다.

이것은 영양의 상징물인 반딧불이란다.

나는 이런걸 좋아한다.아직도 ㅎ


집에 돌아와 이 사진을 큰딸내미에게 보냈더니 돌아온 대답이 "? "였다.

그래서 장황하게 설명을 해줬는데 또 돌아온 대답이 "뭐 별로인데.이상해요"였다.

이쁘다 할 줄 알았더만.


딸내미의 그런 느낌에 문득 내가 좋아했던,그래서 그의 요절이 안타까운 오주원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서 읽었던 귀절이 생각났다.


<사람의 눈은 최고의 성능을 가진 카메라이며 인간의 두뇌 역시 엄청난 고성능 컴퓨터이다.눈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순식간에 올려다보는가 하면 내려다 보기도 하며 광각 렌즈처럼 한거번에 주욱 휘둘러보는가 하면 망원렌즈처럼 겹쳐진 봉우리 사이로 저 멀리 아른거리는 먼산 풍경까지 비껴 보기도 한다.가까운 것은 가까운 대로 먼 것은 먼 대로,밝은 것은 밝은 대로,어두운 것은 어두운 대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적응하면서 다양한 대상의 갖가지 모습을 정확히 포착한다.>


아무리 좋은 사진기라도 인간의, 컴퓨터보다 치밀한 감성까지 표현 할 수는 없는거니까.아직까지는.






영양 군청 마당에서 영양호국공원으로 옮겨 온 영양 서부리 비석군(英陽西部里碑石群).

여기에 있는 비석군들도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의가 공덕비였는데 나는 이런 공덕비엔 별 관심이 없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비석머리의 장식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거나 너무 황당하여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도 있다.






영양 서부리 척화비(英陽西部里斥和碑) 앞에 선 카페지기의 표정이 아주 흡족해 보인다.


척화비는 대원군이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다 실패한 후 천주교를 탄압하고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과 문호개방을 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을 물리친 후 척화비가 세워졌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영양의 척화비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척화비 중 하나일 것이다.






서부리탑을 돌아보고 자동차로 이동한 곳은 영양읍 현리.

원래 이 지역은 반변천을 낀 넓은 경작지였다고 하는데

근래에 이곳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생겨 우리는 다리가 지나는 제방둑 아래로 뚫린 길을 지나야했다.


이곳에 당간지주와 탑이 있다고 했으니.






아~!!

나도 모르게 절로 탄성을.

보인다.






당간지주는 현재 동쪽편의 한 주만 남아 있으며 당간지주가 서있는 부분이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이고,멀리 보이는 삼층석탑이 서있는 지역이 사찰의 중심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가람의 중심 축선이 동서로 이어지고,그 좌우에 다수의 건물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양현동당간지주(英陽縣洞幢竿支柱)

문화재자료 제85호(영양군)로 지정된 현동당간지주는...한 짝 뿐이다.


튼실한 시멘트 교각이 줄줄이 떠 받치고 있는 가로로 놓인 다리와 세로로 오두마니 서 있는 당간지주의 묘한 조화.






당간지주의 지주는 외면만 외곽 모서리를 모나지 않게 깎아 다듬고,가운데에 일정한 높이의 낮은 세로띠를 장식하였다.정상부는 내면에서 외면으로 나가면서 유려한 곡선을 형성하고 있으며,외면과 만나는 부분에서 한단 낮게 굴곡을 두었다.






기단은 묻혀있어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간대석은 상부가 노출되어 있다.간대석은 사각형 대석으로 좌우에 홈을 파고 지주를 끼워 세웠으며,상면에 이중의 원좌와 그 가운데에 원공을 시공하였다.간대석의 시공 수법으로 보아 당간은 목당간이나 철당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양 현리 반변천 북쪽에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사찰의 명칭이나 내력은 파악할 수 없으나 인근에 영성사 등의 불교 유적지가 있어

이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사찰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간지주를 만났으니 이제 탑을 만나러.






보물 제6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양 현리삼층석탑(英陽 縣里 三層石塔)

오늘 오전에 만났던 화천리탑과 비슷한 모양새다.


바닥에 지대석을 깔고 이중기단을 두었는데 하층기단에 십이지신,상층기단에는 팔부신중,그리고 1층 몸돌에는 사천왕이 새겨진 조각장식이 많은 탑인데 이러한 양식은 9세기탑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영양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탑이 많았다.






1층 몸돌을 장식한 사천왕상.






상층기단의 팔부신중.






하층기단의 십이지신상.






탑과 당간지주가 있는 풍경.

이 너른터에 자리잡고 있었을 사찰의 크기는 얼마만했을까.






오후 1시 40분 쯤.

이제 영양답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탑을 보러간다.

탑은 반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잘 가꾸어진 놀이터를 지나야 한다.


날 맑고 볕 좋은 가을 오후지만 놀이터는 텅 비어있었다.






놀이터를 지나며 고개 들어보니 배배 말라버린 나뭇잎만 겨우 매달린 나뭇가지 사이로 어룽어룽 탑이 보인다.






영양 현이동모전오층석탑(英陽 縣二洞模塼五層石塔)


자리잡은 절집 마당이 좁게 느껴질 만큼 제법 큰 탑.


이탑은 탑신의 2층까지만 남아 있었던 것을 새로이 복원해 놓은 것으로, 꼭대기에는 노반, 복발, 보주가 차례로 얹혀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으며 탑의 비례는 매우 엄정하여 알맞은 상승감과 비례를 보여준다.


날씨탓인지 탑을 쌓으면서 더해진 진흙 때문인지 탑에서 분홍빛이 살짝 느껴진다.나만 그랬나?






탑의 동쪽면으로 네모난 감실을 냈는데,문설주 돌에는 섬세하고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어 이 탑에 들인 공을 엿볼 수 있다.그런데 위와 아래의 석재가 확연히 다르다.나무문 안에는 새로 만든 듯한 불상 한 구를 모셔두어 감실이 본래 부처를 모시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이동모전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작은 절집 영성사 마당이었다.

작은 절집이지만 높직하고 눈맛 시원하니 아득하게 현동삼층탑과 당간지주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적당하게 자리잡을 데가 없어서 그런지 쓰임새를 몰라서 그런지

오래된 소맷돌 한쌍이 지금은 절집 전각 앞 양쪽에 덩그러니 누워 빗물을 받고 있다.






영양 현이동모전오층석탑을 마지막으로 올 해의 마지막 답사처인 영양답사를 마쳤다.

다른때와는 달리 이번 영양답사는 그리 빡빡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답사의 끄트머리는 피곤하기 마련.

늦가을이라해도 한낮의 볕은 부드럽지 않아 모두들 절집의 요사채인 듯 싶은 일월산방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나는 가을이 좋다.

나는 이런 여유가 좋다.

나는 이런 자연스러움이 좋다.

나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좋다.

그래서 나는 옛님방의 단체답사를 좋아한다.






현이동 모전석탑을 마지막으로 이번 영양답사의 공식일정을 마치고

당간지주와 탑을 보러올 때 자동차를 세워 두었던 반변천 제방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다리가 지나는 아래 부터 현동탑과 당간지주가 있는 곳으로 길게 뻗은 제방은 주민들의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어 그런지

공원을 깨끗하게 사용하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검정 페인트로 교각에 써 놓은 '아니 온 듯 다녀 가시옵소서" 보다

걸어놓은 현수막에 쓰인 "가져온 쓰레기는 다시 가져가라 전해라"는 글귀가 더 눈에 들어온다.

("~라고 전해라" 라는 유행가를 좋아하지 않지만.)






저~기 멀리 보이는 지주에 걸어 놓은 비단천이 펄럭이며 이곳부터 절집이라고 알려주었을 그 옛날 사찰이 누렸을 영화를 가늠해보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느려졌던 것은 1박 2일의 답사가 끝났다는 아쉬움까지 더해져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당간지주를 만났다는 위안으로.



산꼭대기에 올랐다고 산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산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올라서서 보아도 다 못 보는 구석이 있다.

창너머로 산을 보거나 오며가며 늘 보아오던 모습만으로 그 산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만용에 다름아닌데

잘 안다는 그 짧음 한쪽에서만 보아온 치우침과 편향된 시선으로 우리 옛님을 대했던 것은 아닌지가

이 답사기를 쓰는 내내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보아도 산을 다 못 보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나 답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홀로 찾아다니며 샅샅이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 옛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고 말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는 반성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고독을 만들고 그 고독은 또 다른 인연을 만든다는 말처럼

고독하기에 길을 떠나고 그 길에서 여러 사람과의 소중한 인연도 소중한 시간도 갖게 되는 단체 답사.

1박 2일 동안의 답사를 다녀오면 얼마동안은 흑백 스틸사진 같은 일상을 버티는 힘이 생기니

내 부끄러운 무지를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또 일상의 에너지를 얻으려 다음에도 나는 단체답사에 함께 할것이다.


사족...

이번 영양의 첫번째 답사기는 62컷,두 번째는 67컷 도합 129컷의 사진을 이용해 썼지만 글의 완성도엔 자신이 없으니 

이 답사기를 읽는 분들께서는 혹시 글이나 사진에서 발견되는 오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