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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경북 영양 돌아보기 1(2016년 11월 19일) 본문

답사.여행 후기

경북 영양 돌아보기 1(2016년 11월 19일)

푸른새벽* 2016. 11. 29. 22:08



지난 9월의 원주답사 후 다음은 경북 영양이라는 말을 듣긴했지만 그래도 확실한 공지는 아니었기에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11월의 답사는 경북 영양이라 공지가 되었고 기대와 기쁨은 다른 고장의 답사보다는 몇 배 더 컸었다.

경북 영양은 나에겐 아직 미답처였기에.


2016년 11월 19일.

새벽 5시 30분,집 앞에서 함께 출발할 일행 셋과 만났다.

늦가을의 아침은 깨어나지 않은 이른 시간,천지는 짙푸른 새벽이었다.




오전 9시 조금 넘어 도착한 곳은 영양의 선바위관광지 주차장.

답사시작 전 관광지주차장의 안내판 앞에서 영양에 거주하는 회원으로부터 영양답사의 동선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들었다.







영양관광지를 그려 놓은 안내판으로만 보면 우리가 옛님을 찾아 움직일 동선이 그리 복잡하거나 길지는 않을것 같다.


영양답사에 참가한 인원은 22명. 

늦가을이지만 아직은 가을관광철이고 아수라장에 다름없는 현재 나라안 사정이라 버스를 빌리지 못했다해서

회원들이 타고 온 자동차 다섯 대에 나누어타고 움직이기로했다.

첫 답사지는 입암면 산해리.

새벽부터 수상했던 하늘은 드디어 추적추적 비를 뿌리기 시작했고.







오전 9시 50분 쯤.

오~!!


답사 첫걸음부터 너무 강렬한것 아닌가~







이럴땐 할 말을 잊었다는 표현보다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을씨년스런 계절과는 상관없이 너무도 당당한 모습이라 오히려 마주한 사람을 주눅들게했던 산해리 오층모전석탑(山海里 五層模塼石塔) 

하긴 날씨가 무슨 대수랴.

천년이상의 세월을 견디다보면 자연의 변화무쌍은 무수한 세월 한조각에 다름 아닐터.


얼마전까지는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동네 명칭이 봉감이라 봉감오층모전석탑으로 불렸던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국보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웅장하고 장엄해도 단단하고 결이 꽉찬 화강암材 탑보다는 야물딱진 느낌은 덜하다.

탑을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 벽돌모양으로 만든 돌의 성분에 모래가 많이 섞여 그런가도 싶었지만

오랜세월을 지냈음에도 망가지거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면 그도 아닌듯.


아무려나

사진속의 인물처럼 뒷짐지고 느긋하게 탑을 바라보는 여유.







산해리모전탑은 다른 전탑이나 모전탑과는 달리 조금 특이하다 싶은 것이 있었다.

탑의 몸돌에 띠모양으로 둘러진 턱.


2층부터 층마다 중간 부분에 조성되었는데 턱의 아래쪽은 비교적 큰 돌로 자유롭게 쌓고 위쪽은 모전 석재로 차곡차곡 쌓아, 턱 아래 위를 서로 다르게 쌓은 방식이 특별하다.고려시대에 조성된 탑들 가운데 특히 충청도지역을 중심으로,굄돌처럼 몸돌 아래쪽에 좀 튀어나온 별석을 한 층씩 끼우는 보기가 있다는데 그런 것의 변형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중국 전탑의 경우에도 탑신 아랫부분에 난간이 설치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모습을 띄고 있다고 보는 주장,또 이 탑의 5층 상륜부와 탑 주변에서 다량의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탑의 지붕에 기와를 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또 그냥 시각적인 효과로 볼 수 있다는 주장.나는 이 모두의 주장이나 의견에 고개 끄덕인다.그런 의견을 주장하는 모두가 이 탑을 축성했을 당시의 현상을 모르니 다양한 주장과 추측이 있을 수 있고 아직은 어느것이 맞다고 딱 떨어지게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까.


산해리탑은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지붕 부분과 5층탑신 윗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는데 1989년 6월부터 1년 여에 걸쳐 해체.수리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비교적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고,우리 손에 의해 완전 해체.복원됨으로써 내부와 기단 구조를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탑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니란다.







이 탑의 가장 많이 튀어나온 모서리돌 가운데 옛날에 풍탁 등을 달았던 구멍이있다고 하던데 나는 그건 놓쳤지만 더 이쁜걸 보았다.

탑의 지붕돌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강아지풀.

계절 사위어 시든 강아지풀이라해도 나는 시들어 고개 떨구었다 생각지 않는다.

나는 강아지풀을 좋아하며 그건 강아지풀이 새순을 틔워내는 그 순간부터이니 계절에 상관없다.







에고~또 또 또 ㅎ

지난번 원주에서도 다람쥐마냥 탑 근처의 나무에 올라가더니만 이번에도 또.

왜 또 올라갔냐고,감나무가지는 엄청 약한데 떨어지면 어쩌려구 그러냐며 걱정하는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이 다람쥐청년은 아랑곳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사리 딴 감은 누가 먹었을까?

난 절대 아닌데~ㅎ







세상에 절대 불변인 것은 없다.

다만 탄생되고 소멸되는 것이 있을 뿐.







산해리탑을 만나고 다음으로 찾은 곳.

영양군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영양신구동삼층석탑(英陽新邱洞三層石塔)







영양신구동삼층석탑(英陽新邱洞三層石塔)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소박한 탑인데

노반이 거꾸로 얹혀있어도,일견 얼룩덜룩해 보여도 석불좌상과 함께여서 좋았다.







영양 신구리 석불좌상(英陽 新邱里 石佛坐像)은 삼층석탑 곁에 있는데

일부가 파손되고 마멸도 심한 상태여서 상호를 거의 분간할 수 없이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다.


석불 뒤편의 노란 모과 한 개.

저 모과를 누군가가 주웠고 몇 시간 후 저 노랑 모과임직한 것이 내 손에 쥐어졌다.

가을향 꽉찬 모과 한덩어리를 내게 선물해 준 분께 이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신구리탑이 자리하고 있는 이 일대는 사찰의 이름이나 내력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은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폐사지에 대한 자료인 한국사지총람에선 그냥 영양 신구리사지(英陽 新邱里寺址)로 기록되어 있다.


폐사지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민가에 둘러싸여 있어 예전의 절터라고는 믿기지 않지만 그래도 탑과 석불이 있어 어느만큼은 가늠이 된다.







신구리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보이는 약산당(藥山堂)

건물의 크기에 비해 팔작지붕이 거창해 보이는 약산당은 장례원 판결사 조광의(1543∼1608)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라는데

신구리삼층탑에만 관심을 두었지 이곳에 이런 건물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례원 판결사가 뭐하는 직책인지 조광의가 누구인지는 크게 관심이 생기지 않아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제대로 된 답사라면 이래선 안된다.)







오전 11시 쯤.

먼지같은 가을비를 맞으며 영양답사의 세번째로 찾은 곳.영양군 입암면 신사리.

이곳에도 탑이 있다하니 그냥 무조건 따라왔다.

어느방향에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방향도 모르고 그냥 저기 왼쪽으로 보이는 비닐하우스 근처라니 그곳으로 발걸음한다.

신사리석탑은 비지정문화재인데 카페 주인장이 얼마전에 어렵사리 찾았다고 한다.







사람다니는 길가에선 비닐하우스로 인해 보이지 않고 뒤쪽으로는 컨테이너 창고뒤편 허접한 길을 지나야 찾을 수 있으니

눈썰미 야물지 못하면 찾기 어려운게 당연하지.

그러고보면 카페 주인장은 탑 냄새(?)를 맡는데도 일가견이 있나보다.ㅎ







에고 귀여워라.

근데 이렇게 날궂고 축축한데 안춥나?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듯한 아기강아지가 쇠줄에 묶여 비를 맞고 있는게 안쓰러웠다.

평소같았으면 벌써 안아봤을텐데.







영양군 입암면 신사리.

탑은 채 거두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고추대궁이가 도열한 밭 한가운데 지붕돌만 조로록 얹힌 모양으로 보인다.







푸른 이끼에 덮힌,온전치 못한 모양새의 지붕돌과 불그스름한 빛의 몸돌.

층층이 쌓은 지붕돌이 뭔가 많이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각 부재들이 뒤집혀져 있는게 뒤죽박죽이라할까...







멀리서 보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기단부가 보기보단 큰 탑일 것 같은데 탑신괴임은 3단이다.

탑 앞에선 모두의 한결같은 바램은 비록 온전치 못한 부재일 뿐이라도 최소한 탑의 기본모양에 맞게 보존.관리되었으면 하는...


모든 부재가 잘 갖추어져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온전한 탑에서보다 이렇게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엉성한 탑 앞에선 이야기가 많아진다.







오전 11시 30분 경.

우리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영양읍 선바위관광지 주차장으로 되돌아왔고

점심식사를 하기 전 주차장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선바위와 남이포를 잠시 돌아보기로했다.







남이포라했던가.

지금 이곳은 도로공사로인해 주변이 몹시 어수선해 남이포의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정취를 느끼긴 힘들다.


먼지같은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아직 잿빛이다.







도로변에 위치한건지 아니면 이곳에 도로가 생긴건지.

남이장군의 전설을 품은 선바위의 주변도 어수선하긴 마찬가지.







배도 고프고 날도 으스스해 그냥 사진만 덜렁 한컷.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왜 이곳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양이란 고장에서 꼭 들러보아야 할 관광지로 회자되는지 모르겠지만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는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물이나 장소에 깃들인 정확한 팩트나 역사적인 가치보다는 달빛에 물든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기존 체제의 완고한 틀에 저항해 핍박을 받았던 인물에 대해서 동정심과 연민의 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곳 입암은 젊은 나이에 처형을 당한 남이장군에 대한 전설이 있지 않은가.







낮 열두시 조금 못 미쳐 들어간 식당.

새벽에 출발한 회원들이 대부분이라 점심먹기엔 조금 이른시간이라도 우린 정해진 식당에 도착했다.







산채비빔밥.

카페에서 올린 영양답사 계획표에 점심식사는 선바위가든이라해 인터넷을 뒤져 보았었다.

선바위가든에 대한 카페나 블로그의 사진과 글은 한결같이 맛있고 깔끔하고 영양에서 대표적인 맛집이라는 칭찬 일색이었던지라

그런걸 전적으로 믿지는 않아도(오래 여행하면서 경험한지라) 평균은 되겠다 싶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나는 몹시 시장했었어도 음식의 맛은 그냥 평범한 비빔밥에 더할 무엇도 없었는데

왜 사람들은 이런 음식에 열광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정도의 비빔밥이라면 집에서도 얼마든지,아주 간단하게 만들어 먹을수 있는거 아닌가?


그런데 각종 블로그나 카페에 게시된 사진엔 비빔밥 위에 달걀프라이가 얹혀 있던데 왜 우리가 먹은 비빔밥엔 달걀프라이가 없었을까?

나는 오로지 그것만 궁금하다.ㅋ







점심식사 후 찾아간 영양의 서석지.

눈 맛 좋게 흙과 돌로 쌓은 나즈막한 막돌담장이 부드럽고 편안하다.







서석지를 품은 마당으로 드는 쪽문.







중요민속자료 제 108호인 이 정원은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1577~1650) 이 조선시대 광해군 5년(1613)에 만들어진 민가의 연못이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연못이 펼쳐지는데 대문을 등지고 바라보면 왼쪽으로 자리한 건물이 경정(敬亭)이다.







연못 건너편 마주보이는 건물이 주일재(柱一齋)인데,주일재는 방 두 칸,마루 한 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지금이사 꽃철 끝났지만 넘실넘실한 연잎 가득차고 봉오리 예쁜 연꽃이 핀다면 정말 볼만은 하겠다.







앞 네 칸은 마루로 활짝 틔우고 뒤쪽은 가운데 두 칸을 대청 삼고 양쪽에 방을 한 칸씩 들여,

마루에서 건너편의 서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알맞춤한 경정.


한여름 지글지글 끓는 더위에도 앞뒤로 바람길이 열린다면 에어컨이 무색하지 싶다.

반들반들 시원한 대청에 누워 책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신선이 별거겠는가.







건물만 있는 비어있는 공간보다

웃음소리로 채워진 공간의 풍경은 이렇게 다르다.







가을은 이파리 다 떨군채 못다 정리한 열매만 남기고 저만치 겨울로 향해 가는데...







서석지에서 가까운 곳에 연당리석불좌상이 있다.







자동찻길에 인접해도 지금은 적만 뿐인듯한 곳에 모셔진 연당리석불좌상.







시도유형문화재 제111호(영양군)로 지정된 영양연당동석불좌상(英陽蓮塘洞石佛坐像)

그리 크지는 않으나 몸체와 광배,대좌를 모두 갖춘 석불인데 광배는 어쩐일인지 떨어져 석불아래에 세워져 있는데

광배의 문양은 화려하고 섬세하다.

왼손에 둥근 약합을 들고 있는걸로 보아 약사여래불이라고 보면 맞지 싶다.

떨어져 세워놓은 광배보다 파손이 심한 어깨가 안쓰럽다. 


이 불상의 뒤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명문을 밝혀내 카페에 게시한 자료가 있어 이곳에 옮긴다.


신라 진성여왕 3년인 889년 당나라 소종 용기 원년과 일치한다.

을유년: 985,925년,865년,805년,745년,685년,625년

기유년: 1009,949년,889년,829년,769년,709년,649년

625년: 당나라 고조 무덕(武德)8년

649년: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23년

685년: 당나라 예종 수공(垂拱)원년

709년: 당나라 중종 경룡(景龍)3년

745년: 당나라 현종 천보(天寶)4년

769년: 당나라 대종 대력(大曆)4년

805년: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21년,순종 영정(永貞)원년,발해 목종 정력(正曆)12년 

829년: 당나라 문종 대화(大和)3년,발해 성종 건흥(建興)12년

865년: 당나라 의종 함통(咸通)6년

889년: 당나라 소종 용기(龍紀)원년

925년: 당나라 장종 동광(同光)3년,고려 태조 천수(天授)8년

949년: 후한 은제 건우(乾祐)2년,고려 광종 광덕(光德)원년,요나라 세종 천록(天祿)3년

985년: 북송 태종 옹희(雍熙)2년,요나라 성종 통화(統和)3년

1009년: 북송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2년,요나라 성종 통화(統和)27년

 

연호의 끝글자가 원(元)자,광(光)자,기(紀)자,용(龍)자와 비슷하여 대입해 보니

신라 진성여왕 3년인 889년 당나라 소종 용기 원년과 일치한다.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게 남근석이란다.

그동안 봐 왔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것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보는것도, 곁에 있는 것 조차 낯부끄럽고 민망한 요즘 관광지의 즐비한 남근석과는 달리

오래된 우리 조상님들의 손때가 묻은,지독한 기원이 담긴 남근석은

거칠고 투박하거나 과장이 심해도 나름 해학이 있고 믿음의 대상이 된것들이라 경외심까지 느껴지기도 했었는데

이건 나무상자에 넣어 놓아서 그렇게 보이나?

남근석이라는 설명이 없었으면 전~혀 예상치 못했을 터.







연당리석불이 있는 곳 맞은 편의 풍경.

쌓은지 오래된 듯한 석축위로 자리잡은 음전한 집 한 채.

서석지를 거느리고 있는 주택의 부속건물인가?

그나저나 지금 사람이 살고는 있는걸까?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영양답사의 일곱번째 답사처인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 68번지.

이곳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갸우뚱했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영양 기포리 영산사라는 명칭과 영양 기포리 비로사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영양군청의 자료에 의거해 정리하려 한다.

영양 기포리 영산사석불좌상(英陽 基浦里 靈山寺石佛坐像)이라는 자료가 있으니 이곳을 영양 영산사라하겠다.







비로전이라는 편액이 걸린걸 보니 이 불전엔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나보다.







영양 기포리 영산사석불좌상(英陽 基浦里 靈山寺石佛坐像)은 영산사 비로전에 주불로 모셔져 있다.


수인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인 것 같은 이 석불의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산사 현 주인의 4대조 할아버지 이전부터 모셨다 하니 1921년 이전부터 다른 곳에 봉안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호는 원형에 가까워 매우 도식적이며 육계와 삼도는 뚜렷하다. 우견편단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영양군청자료참고)


살집많은 둥실한 상호가 마치 푸근한 이웃집 아주머니 같다.







영산사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눈길을 사로잡았던.

모양새를 보아하니 양봉이 아니라 우리벌을 키우고 있네.







다음의 답사처는 영양군 청기면 무진리.

저 언덕 중간 녹이슬어 붉게 보이는지 아니면 붉은 칠을 해서 그런지 아무튼 붉은 철책으로 둘러쳐진 곳.







무진리사지(無盡里寺址)라 하니 절이 있었던 곳이라 전하지만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주변 민가에서 사용했음직한 우물.

무진리사지를 찾을 때 이 우물이 길잡이 역할을 해 그나마 수월했었다는 일행의 전언이다.

지금 우물은 쇠락하여 날파리 버글버글 날리는 더러운 물로 가득차 있다.







바쁜 답사걸음이지만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모셔진 석불의 대좌와 광배를 보기 위함.

지정문화재가 아니라서 어떠한 안내판도 표식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자리에 잘 모아놓은 마을주민들의 손길이 고맙다.


처음 영양 답사공지 계획표에서 '무진리사지 부처님 방석자리'라는 글에 의아했었더랬는데

여기를 찾으려고 우리 카페지기는 아랫마을에서 노인분을 만나 공손히 여쭈었더니

"광배.대좌 그런거는 모리겠고 저~우에 부처님 방석자리는 있다"라는 말에 탄복을 했었다고 한다.

대좌보다 '부처님방석자리'라는 표현이 얼마나 친근하고 좋았었는지 모르겠더라고.

맞다.

부처님방석자리.정말 멋진 표현이다.







상대석.하대석.중대석이 나란하지만 하나의 통일된 대좌는 아닌것 같고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표현된 말하자면 주형거신의 아름다운 광배인데

아랫부분은 땅속에 묻혀있다.


대좌와 광배는 나란한데 부처님은 어디로 외출하셨을까...







1.
사랑은 계단을 밟으며 차근차근 오지 않는다.
사랑의 독화살은
일순 핏속을 전염시켜
아찔한 환각을 피운다.

지상의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란다.
숨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찰랑, 가슴에 넘친다.



2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돌아보지 마라.
늑대처럼 덤벼드는 사랑을 하라.
하늘이 수평선을
단번에 뒤집어버리는 바다에서는
뒤돌아본 사랑은 빠져 죽어
하얀 넋만 남는다.
희디흰 뼈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쌓이는 것은
돌아본 사랑의 넋 부스러기이다.

새도 그곳엔 앉지
않는다.

(신광철/늑대의 사랑)








무진리사지의 부처님방석자리를 만나고 살펴보고 돌아오는 길.

경사진 길을 걸어내려오는데 얼핏 화살하나가 뜨거운 궤적을 그리며 가슴 한가운데에 꽂힌다.

아~!

오늘 토요일.

지난 한달 동안을 매주 토요일 밤마다 나는 가슴을 졸이고 있다.

광장에 모인 거대한 군중들이 쳐든 촛불에 어떠한 상처도 생기면 안된다는 걱정과 초조함에.

오늘도 부디 아무일없이,정말 충돌없이 무사히 끝나길.







오후 3시가 살짝 넘은 시간 찾아 간 곳.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에 자리잡은 선운사(善韻寺)는 자동찻길에 인접한 전각이 달랑 두 채 뿐인 아주 작은 절집이었다.

원래 이 절집의 이름은 구도사였으나 1989년 개칭하였다고 한다.







여염집 같은 선운사엔 마당 양쪽으로 엎어놓은 빈 독이 엄청 많았다.

여긴 경상도.

통상 경상도와 전라도처럼 아랫녘의 장독은 경기도의 장독과 모양새가 많이 다르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장독은 가운데 배가 빵빵하니 부르고 서울.경기 지방의 장독은 밋밋하게 일자에 가까운 모양이다.

근데 선운사 마당에 엎어진 장독은 경상도의 것이라기엔 배가 그리 부르지 않다.경남과 달리 경북이라서 그런가?

근래에 만들어지고 판매되는 장독은 화학약품으로 유약처리되어 엄청 반질반질한데

이곳 선운사의 모든 장독은 유약으로 인한 광택없이 수더분하니 건강해 보인다.

저런 장독 두어개 쯤 우리 마당에 가져다 놓고 철철이 된장.고추장을 담고 싶다.







선운사 주불전은 대적광전이니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나보다.







선운사 석불좌상은 영양군청의 자료에 도곡리석조여래좌상(英陽 道谷里 石造如來坐像)로 표기되어 있는데

상체에 비해 가부좌한 하체가 엄청 빈약한데 대좌가 없어 그런 느낌이 더 강하다.

가슴에 두손을 모은 지권인 수인이니 비로자나불이 분명한데...

일행들은 조선후기 쯤의 석불이라 말한다.







하이고~이쁜녀석.

절집의 견공들은 몇몇 절집을 제외하곤 모두 이렇게 낯선사람도 경계하지 않는다.

쓰다듬어 주고싶은 절집 견공 흰둥이~


그런데 개집이 정말 작품이다.ㅋ







영양 일월광산 선광장(選鑛場)이 있는 곳.

일월산자생화공원이다.

이곳은 1939년에 건너편 일월산에서 채굴한 금속광석을 이곳 용화 선광장(選鑛場)으로 운반하여 금.은.동.연(鉛). 아연을 약40여 년 간 생산한 곳으로 주변이 카드뮴.비소.납등 중금속으로 오염된 지역이었으나, 정부의 폐금속광산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일월산자생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다.







일본 광업주식회사에서 건설한 광산 시설인 이곳은 지금 등록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야~저 동굴안에 잘 생긴 석불이라도 모셔놓았으면 금상첨화였을텐데 "

누군가의 말에 우리모두는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거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 시설에 대한 것은 나름대로 자료를 모아 개별적으로 포스팅하려 한다.)







용화광산이 있는 공원에서 탑을 보러 가는길.

탑이 있는길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안내판보다 저~기 탑이 먼저 보인다.







갈색의 표지판이 안내하는 길을 찾아 걷는데 왜 갑자기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질까?

아...

해저물녘의 시간.

나는 낯선곳,이런 저물녘엔 항상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지니 이건 분명 병이지,병이고 말고...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머지 않은 곳,영양 용화동삼층석탑(英陽 龍化洞三層石塔)은 민가의 위쪽 밭 한가운데 서 있는데

단정하고 야무지다는 느낌이드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여러가지 양식으로 따져 볼 때 고려탑이 확실하다는 의견도 있다)

2층의 기단에 3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인데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가 정연하고 탑의 몸돌에는 양쪽으로 우주가 보이는데 탑날개가 살포시 들려있다.


내 눈에는 전체적으로 탑이 까무스레 해 보이는데... 계절,혹은 시간탓인가.







뒷모습에서 열정이 느껴진다.

팡팡한 엉덩이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탑에만 집중되어 있는 모습.ㅎ







영양이란 고장은 고추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데 이 고추세척기도 그 유명세에 한 몫하고 있지 않을까.

화천동탑을 돌아보고 오는길,시멘트로 말끔히 포장한 시골집의 마당이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보통 시골집이라는 생각을 하면 기둥엔 광주리 몇개가 걸려있고 보드라운 흙마당에 고추가 널려 있는 그런 감성적인 생각을 하게 되며

얼마전까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나는 요즘 시골집 마당이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된 것에 대해 적극 동감한다.


나도 시골에 살다보니 일년 사시사철 몹시 번거로운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마당에 자라나는 잡초들 때문이다.

날이 더우나 추우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어쩌면 그렇게 계절에 상관없이 잡초들은 억세게 자라나는지.

뽑아내고 돌아서면 바로 또 자라는게 잡초다.


부지깽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게 농번기라는데 매냥 자라나는 마당의 잡초까지 무성하다면 그 번거로움이란게 말 안해도 뻔하다.

그래서 요즘 농가주택의 마당은 거의 이렇게 시멘트로 싹싹 발라 놓은 것이다.







저녁 다섯시 쯤 1박 2일의 답사 중 하루의 일정은 끝났다.

1박 2일 영양답사의 숙소로 정해진 곳.영양군 일월면 문암리.


뿌연 산자락으로 흐린 하루가 내려 앉는 시간.

느닷없이 허기가 몰려온다.감성의 허기가.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곳 에코센터는 완공되어 내방객들에게 개방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저녁식사 전 식당에 모여 이곳을 관리하는 분으로부터 영양에 대해서,또 이곳 에코센터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청결이나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어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을땐 정말 훌륭한 시설로 변해있을거라는 확신에 찬 말도 함께.

또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소장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