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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굴산사지당간지주(江陵 掘山寺址幢竿支柱).강원 강릉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강릉 굴산사지당간지주(江陵 掘山寺址幢竿支柱).강원 강릉

푸른새벽* 2018. 7. 5. 20:46









































































강릉 굴산사지당간지주(江陵 掘山寺址幢竿支柱)


굴산사 초입에 해당하는 들판 가운데 웬만한 3층 건물은 돼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당간지주가 한눈에 들어온다.높이 5.4m의 이 거대한 당간지주느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당간지주 두 기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석재인데,현재 당가닞주의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어서 당간을 세워놓은 기단석 등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대개의 당간지주는 아무리 장식성이 없다고 해도 바깥쪽 모서리의 모를 죽인다거나 곽선을 두른다거나 지주 꼭대기가 유려한 사분원을 그리는 게 흔한 일인데,이 당간지주는 지주 네 면에 아무런 조각도 없으며 아랫부분에는 돌을 다듬을 때 생긴 잡다한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거의 꼭대기까지 직선을 이루고 있으나 꼭대기에 이르러서는 차츰 둥글게 깎아 곡선이 되도록 하였다.그래서 꼭대기에 와서는 첨형을 이루고 있는데,그나마 남쪽 당간지주의 꼭대기는 약간 파손되었다.


당간을 고정 시키는 간공(杆孔)을 아래위로 두 군데에 마련하였는데,위쪽은 상단 가까이에,아래쪽은 밑둥치에서 4분의 1 되는 부분에 둥근 ㅜ멍을 관통시켜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게 하였다.


지주의 규모가 엄청나 이 당간지주에 세워졌을 당간의 높이가 얼른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일반적으로 당간이 지주의 서너 배가 된다고 보면 어림 잡아도 10층 건물의 높이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하늘을 찌를 듯한 긴 당간 위에서 깃발이 펄럭거렸다면 아마도 10리 밖에서까지 이 절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당간지주의 위대함이 규모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그 규모에 맞도록 간결하고 강인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누구라도 통일신라 시대의 웅대하고 힘찬 기력을 느낄 수 있다.보물 제86호로 지정돼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강릉 굴산사지당간지주(江陵 掘山寺址幢竿支柱)


보물 제86호  
강원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1181 


신라 문성왕(文聖王)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문화재청자료*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掘山寺址幢竿支柱)                       


굴산사는 847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통효대사 범일(通曉大師 梵日,810∼889년)이 창건한 사찰이다.범일은 당나라 유학시 명주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를 만났다.그는 신라 사람이었는데 고향이 명주계 익령현 덕기방(溟州界 翼嶺縣 德耆坊)으로 범일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집을 지어줄 것을 간청하였다.이후 범일은 염관(鹽官)에게서 불도(佛道)를 얻고 귀국하여 그 승려의 청에 따라 굴산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굴산사는 창건 이후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堀山派)의 본산으로 발전하였다.전성기에는 사역이 300m에 이르고 승려수도 2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1936년 홍수시 '堀山寺'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굴산사임이 밝혀졌다.


당간지주는 현재 논 가운데 동서로 서있는데,원래는 중심 사역으로 들어가는 진입공간에 배치되었을 것이다.지주는 동일석으로 치석되었으며,노출된 높이가 540cm 정도로 상당한 규모로 마련되었다.현재 노출된 높이로 보아 상당히 깊게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기단은 결실되거나 매몰되어 확일할 수 없으며,간대석도 남아 있지 않다.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정연한 기단이나 간대석은 마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주가 대형인 것으로 보아 당간도 상당한 규모의 높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당간을 견고하게 고정하기 위한 별도의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주부는 평면이 사각인 석주형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각 면의 치석 수법이 다소 조잡하고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일률적이지는 못하다.지주는 내면과 외면이 수직을 이루었고,전후면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올라가다 정상부에서 차츰 둥글게 깎아 곡선을 이루도록 하였다.그리고 지주 상단부는 뾰족하게 올라가다가 꼭대기에서 수평을 이루도록 치석하였다.지주부의 치석 수법 상 간구는 시공되지 않았으며,간공이 상하 2곳에 마련되었다.간공은 두 지주가 모두 원형(지름 19cm)으로 관통(깊이 93cm)되게 시공하였다.그런데 지주부의 치석 수법이 거친 반면 간공은 정교하게 뚫었다.


굴산사는 신라 말기 범일이 창건하였고, 범일이 굴산사에 주석하면서 사세(寺勢)가 확장되었다.이후 명주 지역에서 하나의 산문(山門)으로 발전하였다.범일은 경문왕,헌강왕,정강왕 등 신라 왕실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는 등 신라 정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특히 범일은 헌강왕이 국사(國師)에 봉하기 위하여 중사(中使)를 초빙하였으나 거절한다.이 지역은 신라말기 신라 정부의 영향권에서 다소 벗어난 지역이었다.이러한 사실은 범일이 명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반신라적인 성향을 지닌 이 지역의 호족들과도 어느 정도 밀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러한 경향이 어느 정도 불교미술에도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한편 범일은 중국 유학 후 줄곧 굴산사에 주석하다가 889년 5월 1일 입적한다.928년 김순식이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이 지역은 서서히 고려의 영향 하에 들어간다.굴산사는 범일이 창건한 이후 고려 초기까지 왕실이나 호족들의 지원으로 여러 번의 불사가 진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런데 당간지주는 통일신라 중기나 말기에는 일반적으로 선종 사찰에서는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와는 다른 면모를 보임과 동시에 이 지역의 중심적인 사찰로서  그 위상을 강조하고 표상하기 위하여 대형의 당간지주를 건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당간지주의 규모가 대형이고,치석 수법이 정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신라 정부와의 관련성보다는 이 지역의 호족이나 고려 정부와의 관련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점 등으로 보아 당간지주는 이 지역의 중심 사찰로서 굴산사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사이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