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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安養 中初寺址 幢竿支柱).경기 안양 본문

☆~당간지주/통일신라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安養 中初寺址 幢竿支柱).경기 안양

푸른새벽* 2019. 3. 15. 09:28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安養 中初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호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중초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


보물 제4호. 높이 3.64m. 원상대로 85㎝의 간격을 두고 양 지주가 동서로 마주서 있는데, 마주 대하는 내측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외면에도 장식이 없다.앞뒤 양 측면에도 조각이 없어 장식적인 의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부에는 약간의 가공이 있어 옛날식을 보인다고 하겠다.즉, 양 지주의 상부는 내측면 위의 끝부분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깎였는데 굴곡이 없이 둥글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 1.21m 지점까지는 6㎝의 두께로 전면(全面)이 깎였다.그러므로 이 모양을 양 지주의 외면에서 보면 정상부에 길이로 널찍한 액면(額面)이 오목새김된 것 같고, 앞·뒷면에서는 상단부(上端部)가 유려하게 원호를 이루면서 상부(1.21m)만을 다듬은 것처럼 보인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상·중·하의 세 곳에 간구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던 것으로,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구멍을 마련하여 간을 장치하였고, 중·하부는 관통한 둥근 구멍에 간을 설치하게 되었다.현재 지주의 기단부는 밑바닥에 장대석의 기반석을 지주 사이와 양 지주의 바깥쪽에 각기 한 장씩 깔아서 기대를 삼고 있을 뿐이다.간대는 지주 사이의 장대석 중심부에 둥근 구멍을 뚫었으며, 그 주변에 둥근 띠를 둘러서 마련하였다. 그런데 간대석과 양 지주 밑바닥의 기반석 높이가 같은 것으로 보아 기단부에는 이 밖의 특수한 구조는 없었던 것 같다.


이곳을 중초사지라고 일컫는 것은 서쪽 지주의 외면에 새겨진 주기(柱記)의 명문에 의한 것이다. 명문의 내용은 모두 6행 123자의 해서체(楷書體) 오목새김으로 자경(字徑)은 6∼7㎝이다.이 명문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채석(採石)하여 이듬해인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하에는 조성책임자인 절주통(節州統) 황룡사항창화상(恒昌和尙)을 위하여 일에 참여한 법사(法師) 10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이 당간지주의 명문은 당간지주의 확실한 조성연대를 밝혀 줄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던 절이 중초사였음을 알려준 귀중한 명문이다. 또한, 명문에는 신라식의 속한문(俗漢文)을 혼용한 곳이 있어 고대 국어사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安養 中初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4호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어져 있는데, 8·15해방 후 인근의 석수(石手)들이 석재로 반출하기 위한 자취라고 전해진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