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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당간지주(楊州 檜岩寺址 幢竿支柱).경기 양주 본문

☆~당간지주/고려

양주 회암사지 당간지주(楊州 檜岩寺址 幢竿支柱).경기 양주

푸른새벽* 2019. 6. 22. 20:56






















































양주 회암사지 당간지주(楊州 檜岩寺址 幢竿支柱)


지정사항 없음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1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현재 사지(寺址)남쪽 서편에 3주(柱)가 세워져 있다.본래는 두 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1주는 결실되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그리고 당간지주의 원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재 위치에서 좌측 15m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 9월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당간지주는 회암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현재 남쪽 편 지주는 2기가 상대하고 있으며,북쪽 편 지주는 1주 만 세워져 있다.3주의 당간지주는 복원 시 하단부를 시멘트로 마무리하여 세웠는데 지주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어 기단이나 간대석은 알 수 없다.3주는 동일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각 면을 고르게 다듬어 정연한 치석 수법으로 마련되었다.지주는 평면 사각 석주형으로 상부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좁아지는 형태이며


외면의 외곽 모서리만 일정한 너비(6~7cm)로 깎아 부드럽게 처리하였다.지주 정상부는 평평하게 수평으로 마무리하였다.그리고 당간을 세울 때 간을 끼우는 간구나 간공은 시공되어 있지 않다.또한 다른 방법으로 당간을 고정시켰던 특별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따라서 당간은 두 지주 사이에 깊게 매몰하고,두 지주에 다른 고정 장치를 사용하여 고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즉,지주부 외곽으로 간을 돌려 당간을 고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당간지주는 정연한 치석 수법을 보이면서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다.또한 각 면을 고르게 다듬어 세련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중앙정부에 소속된 석공이 파견되어 치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당간지주의 치석 수법은 회암사지 발굴 조사 결과 노출된 각종 석조물과 그 수법에서 강한 친연성을 보인다.회암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사찰로이 시기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선각왕사 혜근(先覺王師 惠勤)이 고려 말기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회암사에 너무 많은 불도들이 모여들어 유생들이 회암사의 지나친 발전을 경계하기도 하였다.특히 회암사는  1376년 4월 전당(殿堂)을 확장하는 공사를 마치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개최하였다고 한다.당시 회암사는 대찰로서 전형적인 가람 배치를 완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것으로 보아 회암사의 가람은 고려 말기에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당간지주는 회암사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기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당간지주는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불교계가 위축되면서 거의 세워지지 않았다.따라서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지주부의 치석 수법과 회암사의 연혁 등으로 보아 14세기 말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경기도 향토사료 제13호이다.
*엄기표 지음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중에서*



양주 회암사지 당간지주(楊州 檜巖寺址 幢竿支柱)


지정사항 없음
경기 양주시 회암동 산14-1


회암사지 당간지주(檜巖寺址幢竿支柱)는 회암사가 번영하였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址臺石)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현재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회암사지의 남쪽 서편에 세워져 있다. 원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아마도 회암사(檜巖寺)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총 3주(柱)가 발견되었는데, 지주 이외에 그 기단부나 간대석은 남아 있지 않아 복원 시 하단부를 시멘트로 고정하였다. 3주 모두 유사한 치석 수법을 보인다.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사각을 띠며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는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좁아지는 형태이다. 외면의 외곽 모서리만을 6~7㎝의 일정한 너비로 깎아서 다듬고 지주 정상부는 편평하게 다듬었다. 특이한 점은, 당간을 세울 때 간을 끼우는 간구(竿溝)나 간공(竿孔)이 없다는 것이다.


당간 지주는 2주가 세트를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기 때문에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1주는 전하지 않는다.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정연한 치석 수법을 보인다. 특히 각 면을 매우 고르게 다듬었는데, 이는 양주 회암사지 발굴 조사 결과 노출된 각종의 석조물들에서 보이는 치밀하고 정교한 조각 수법과 일맥상통한다. 회암사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기반으로 많은 불사(佛事)를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회암사지 당간지주 역시 왕실에서 파견된 석공(石工)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디지털양주 문화대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