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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충북 청주 본문

☆~당간지주/고려

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충북 청주

푸른새벽* 2023. 12. 2. 20:27

 

 

 

 

 

 

 

 

 

 

 

 

 

 

 

 

 

 

 

 

 

 

 

 

 

 

 

 

 

 

 

 

 

 

 

 

 

 

 

 

 

 

 

 

 

 

 

 

 

 

 

 

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국보 제41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있는 고려시대 철당간.

국보 제41호. 높이 12.7m. 청주 중앙공원 동북쪽의 여러 건물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철로 만든 당간이다.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안성 칠장사 당간(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과 함께 현재 전하고 있는 대표적인 철당간이다. 특히 건립 시기가 명확히 알려져 있는 귀중한 철당간이기도 하다. 철당간의 주변 지역은 이전의 절터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넓은 광장으로 변하여 관련 유물을 확인할 수는 없다.

당간은 화강암으로 만든 지주 사이에 끼워져 있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바깥쪽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굵게 돋을새김된 선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앞뒤쪽면의 테두리에는 가늘게 오목새김된 선이 있는데, 바깥쪽면의 돋을새김된 선과 어울리면서 장식적인 의장(意匠)을 보인다. 꼭대기 부분에는 안쪽면에서 바깥쪽면으로 약간의 굴곡이 있고, 맨 아래부분에는 널찍한 받침돌과 간대(竿臺)가 놓여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장치는 꼭대기 부분의 안쪽면에 빗장 모양으로 마련되었다.

당간은 원통 모양의 철통(鐵筒) 20개를 위아래로 물려 이어지게 만들었다. 아래로부터 세 번째 철통에는 393여 자의 글자가 주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새겨져 있다. 그것에 의하면, 이 당간은 원래 3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졌으며, 청주 지역의 호가(豪家)인 김예종(金芮宗)이 사촌형 희일(希一) 등과 함께 철당간을 주조하여 사찰을 꾸몄다고 한다. 특히 당시에는 유행병인 염질(染疾)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부처께 재앙의 예방과 사후의 극락천도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고 하였다. 기문에서 ‘유준풍삼년태세임술삼월이십구일주성(維峻豊三年太歲壬戌三月二十九日鑄成)’이라고 하였는데, 준풍은 고려 광종 11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므로, 이 철당간이 962년(광종 13)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료*




청주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국보 제41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문화재청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