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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 ).전북 완주 본문

☆~ 절집.절터/전 북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 ).전북 완주

푸른새벽* 2005. 12. 26. 16:49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1078 

 

화암사에는 문이 없다.
옛 절이라면 어느 절에나 있게 마련인 일주문이 여기에는 없다.사천왕문.금강문.해탈문.불이문...그 어떤 문도 없다.이런저런 문을 세울 여백도 마땅치 않았겠지만,그보다는 진입 공간이 충분히 드라마틱하여 굳이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리라.그래 그런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도 하나도 이상치 않다.굳이 인공적 장치가 아니라도 우리는 그저 옛길이 인도하는 대로 걸으면서 자연스레 '절로 가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차원 높은 구조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다.과정이 생략된 채 단숨에 중심에 다가서는 그런 구조이지만,실은 아무것도 생략된 것이 엇는 미묘한 친입부를 화암사는 보여 준다.


문 하나 통과하지 않고 중심까지 육박이 가능하다고 해서 화암사가 녹록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절은 아니다.도리어 그 반대,8백여 평 대지 위에 여덟 채의 건물이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절이지만 단단한 짜임새,견고한 외양으로 내부를 감춘 채 길손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대체로 절집 누각 건물을 개방적이다.누각 아래는 기둥만을 세운 다음 가운데 칸을 안마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연계하여 통로로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다.위층의 경우에도 벽체 없이 기둥만을 둘러 내부 공간을 시원스럽게 틔워둔다.아니면 벽체를 만들더라도 흙벽에 비해 차단성이 덜한 널벽을 세우고 그마저도 널찍한 문얼굴이 대부분을 차지하도록 한다.여기에 칸칸이 문을 달되 주로 들어열개를 설치하여 자연과의 소통을 극대화시킨다.요컨대 우리네 전통건축의 기본 특성이기도 한 두드러진 공간환원성이 절집 누각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화암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산문이 하나도 없는 화암사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대면하게 되는 건물이 누각인 우화루(雨花樓)다.'꽃비 흩날리는 누각'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보통 누각처럼 개방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아래층은 앞쪽에만 한 줄로 기둥을 세웠다.그리고 중간 또는 뒷줄의 기둥이 서야 할 자리에는 막돌을 차곡차곡 맞물려 축대를 쌓았다.따라서 누각 아래는 전체가 벽처럼 막혀버린 구조로 산지가람에서 흔히 채택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위층도 앞면은 널벽을 시설하고 칸마다 바라지창을 달았지만 창의 크기가 집의 규모에 비해 작은 편이다.그나마 창마저 널문이라서 창이 닫힌 상태에서는 오히려 폐쇄적인 느낌이 강하다.


우화루 아래서 시작된 축대는 꺾어지고 이어지면서 좌우로 펼쳐진다.오른쪽 축대는 얼마 안가 산자락에 파묻히면서 끝이 나고 왼쪽의 그것은 커다란 암반에 이어지면서 다한다.여기에 왼쪽 축대 위로는 돌각담이 나란히 달리다가 암반 위로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절 뒤편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그 돌담 너머로는 건물이 지붕들만이 떠보여 자못 깊이감을 자아낸다.


이렇게 화암사의 외관은 앞,옆,뒷면까지 전개되는 돌축대와 돌각담이 절이 올라앉은 거대한 암반과 어우러지면서 산성의 축소판을 연상케 하고
따라서 누각 또한 자체의 비개방성이 더해지면서 마치 성의 문루처럼 보이기조차 한다.그리고 돌이 주는 단단한 느낌,돌담 너머로 음영(陰影)드리운 듯 깊게 잠긴 건물들,화암사를 '작은 성'에 비유한 소이가 여기에 있다.


'작은 성' 화암사는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절차도 다소 특이하다.누각 아래 길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데로 돌아가야 한다.우화루 왼쪽으로 돌계단이 놓였고 그 위에 문간채가 있다.문간채는 민가의 그것과 꼭 닮은 3칸 一자집이다.3칸 가운데 왼편 두 칸은 방이고 제일 오른쪽 한 칸을 '대문'으로 쓴다.절집에 문간채가 있는 것도 새롭거니와 하필 가운데 아닌 옆칸을 문을 활용하는 것도 새삼스럽다.절집에 흔치 않은 문간채가 들어선 연유가 필시 있으련만 지금으로선 별로 밝혀진 게 없다.


대문은 문턱이 아래로 휘우듬히 휘어졌고 문미(門楣)는 반대로 위로 부드럽게 굽었다.딱딱하여 눈에 거슬리는 모양새가 아니라 본래 그래야 하는 듯 자연스럽다.애초부터 수평재를 쓰지 않고 용도에 맞는 나무를 생긴대로 골라 쓴 결과다.아마 수평재를 썼다면 드나드는 발길에 닳아 자주 갈아댔을 것이다.그러지 않고 처음부터 적당한 곡율(曲率)을 가진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적 안정성과 시각적 안정성을 동시에 얻고 있는 것이다.작지만 소중한,지혜의 소산이다.


세로로 긴 몇 짝의 널을 이어붙여 만든 대문에는 '화암사 대문 시주기'라는 제명(題名)과 '차영재,이길용,이상호...구범회,오영선...' 등등 시주자 이름이 삐뚤빼뚤 어줍잖은 한글로 길게 새겨져 있다.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근엄한' 절집에서 순한글로 뭔가를 적었다는 것도 소박하고 그 많은 이름으로 보아 푼돈들을 시주했을 사람들을 낱낱이 기념해주는 마음이 고맙다.번듯한 글씨로 거창한 현판에 오른 이름을 보는 때와 달리 잠시나마 따뜻한 시선이 머문다.


대문을 들어서서 지붕을 맞댄 우화루와 적묵당(寂默堂)이 만나는 모퉁이 사이를 빠져나가면 안마당이다.화암사의 중심 영역으로,네 귀가 트인 채 반듯하게 네모난 모습이다.북쪽에 남향하여 본전인 극락전(極樂殿)이 다소곳이 자리잡았고 그와 마주하여 우화루가 마루에 깊숙한 그늘을 만들며 섰다.왼쪽과 오른쪽으로는 승방으로 쓰이는 적묵당과 불명당(佛明堂)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극락전과 불명당 사이로 단칸집인 철영재가 빠꼼히 보이고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로는 명부전이 비스듬히 얼굴을 내민다.


화암사 안마당은 작다.네 채의 건물이 처마가 닿을 듯-우화루와 적묵당은 실제로 지붕 끝이 맞닿아 있다-가깝게 다가서는 바람에 작은 마당이 생겼다.작아서 갑갑 할 듯하지만 별로 그렇지는 않다.오히려 느낌은 안온하고 아늑한 쪽이다.아마도 건물의 배치와 높이 때문인 듯싶다 .


유심히 살펴보면 안마당을 둘러싼 건물 네 채의 지붕 높이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지면은 평지에 가깝도록 밋밋하게 높아지며 크기로는 넷 가운데 세번째인데도 극락전은 용마루가 가장 높아 지표에서 8.7m가 된다.본전으로서의 위계를 감안하여 높다랗게 지붕을 만들었을 터이다.
다음으로 지붕이 높은 건물이 우화루이다.극락전과의 차이는 거의 1m에 근사하다.그 다음은 적묵당으로 우화루와의 편차는 0.8m에 조금 못미친다.적묵당과 불명당의 차이는 좀더 심한 편으로 2m 남짓 불명당이 낮다.말하자면 건물이 사방을 에워싸서 폐쇄적인 구조이긴 하되 각 건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높낮이에 변화가 다채로워 단조롭고 지루한 맛을 깨트려주고 있는 것이다.


화암사 뒷편의 골짜기 언덕을 오르면 화암사의 내력이 적힌 화암사 중창비(花巖寺 重創碑)가 서 있다.몸돌의 높이 1.3m,받침을 포함해도 1.7m가 채 안되는 작은 대리석 비이다.비갓 없이 비머리를 둥글게 다듬었다.비문은 정통 신유(正統 辛酉,1441)년에 지었지만,비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융경(隆慶) 6년(1572)이다.아마도 문서 형태로 보존해오던 중창기를 어떤 계기로 이때 비석에 새긴 듯하다.중창비는 15세기 화암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에 해당한다.중창비의 내용,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上樑文).묵서명(墨書銘),
그밖의 몇 가지 기록을 뒤지면 화암사의 옛 자취를 대충 되밟을 수 있다.


화암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삼국시대 말기쯤인 듯하다.


예전 신라의 원효,의상 두 조사(祖師)가 중국과 인도를 유력(遊歷)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은 의상스님이 도솔천(兜率天)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 등신대의 원불(願佛)이다.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臺)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元曉臺)라 하고 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義相庵)이라 하는데,모두가 두 분 조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중창비의 한 구절이다.원효스님이 중국에 갔었다거나 의상스님이 인도까지 다녀왔다는 내용 등은 사실(史實)과 다르다.그러나 나머지 내용은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적어도 조선 전기까지는 의상 스님 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관음상이 남아 있던 것이 틀림없는 듯하고 의상암은 15세기에는 물론 한국전쟁 와중에서 없어지기 전까지는 엄연히 존재했다 한다.그러므로 화암사가 원효와 의상 스님 무렵에 개산되었거나 그 이전부터 이미 존립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도리어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신라에 의한 통일 전이라면 이곳이 백제 영토였을 텐데 어떻게 신라계 사찰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혹시 백제 영토 안에 거점을 확보하려는 신라 측의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경영된 절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겠다.그러나 그보다는 의상이나 원효 이전에 이미 백제인들에 의해 세워진 절이 신라세력이 밀려들면서 주도권이 바뀐 것으로 봄이 어떨까 한다.뒤의 극락전 설명에 나오듯이 현재의 절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백제의 전통도 이를 뒷받침 하는 하나의 예가 되겠다.


이렇게 창건은 되었지만 화암사가 거창한 절로 이름을 떨친 적은 별로 없었지 싶다.무엇보다 큰 절이 들어설 수 없는 지형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그렇지만 세속과 절연된 산사다운 품,들목에 전개되는 오밀조밀한 가경(佳景) 때문에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초사에 오르내리기는 했던 모양이다.고려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였던 백문절(白文節,?~1282)은 화암사를 읊은 7언 40구의 긴 한시(漢詩)를 남기고 있다.그 시에 "계곡에 가로 걸린 작은 정자엔 온 벽에 하나 가득 시가 걸리고"하는 구절이 있다.이로 미루어본다면 그가 생존했던 때 이전에도 많은 시인가객들이 여기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그뒤 어느때부터인가 절이 차름 퇴락했는지 대덕연간(大德年間,1297~1307)에 달생(達生)이라는 인물이 화주가 되어 절을 중창한다.그리고 120여 년 뒤,아주 기이하게도 이름이 같은 성달생(成達生,1376~1444)에 의해 화암사는 대대적인 중창을 보게 된다.그는 2품 벼슬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낸 무신으로 원찰(願刹)을 삼을 목적으로 시주를 자청하여 1425년에 불사를 일으킨다.1429년에는 딸을 직접 절에 보내 일의 추이를 살피게끔 하였다.그때 예전 중창주와 자신의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오늘날 장상(將相)의 지위에 오르고 부귀를 누림이 전생에 착한 공덕의 씨를 심은 까닭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더 많은 재물을 보시하여 꾸준히 일을 진행시킨다.그리하여 역사(役事)는 1440년에야 끝을 보게 된다.이때의 중창은 긴 기간 만큼 절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규모였던 것 같다.불전(佛殿)은 극히 장려하였으며,그밖에 선승당,조성전,여러 요사는 물론 부엌,수각,측간까지 이전보다 크고 넓게 고쳤다고한다.오늘날 우리가 보는 화암사의 골격이 이 무렵에 갖추어진 듯하다.


임진왜란은 산중의 작은 절에도 어김없이 깊은 상처를 안겼다.1597년,왜병의 침입으로 극락전과 우화루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불에 타는 재난을 당했다.극락전은 1605ㄴ녀부터 그 이듬해까지,우화루는 1611년에 예전의 모습대로 복구되었다.그리고 예닐곱 차례의 중건(重建).중수(重修)를 거치면서 화암사는 오늘에 이른다.절 모습처럼 화려한 각광을 받은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조촐한 매무새를 아주 잃어버린 때도 없는 잔잔한 자취이다.


중창비를 뒤로 하고 서편 산등성이로 오르면 그대로 널찍한 바윗등이다.여기에 앉아 남쪽을 향하면 중중한 산이 눈에 가득 담긴다.동에서 서로,서에서 동으로 뻗으면서 골찌기와 능선이 겹겹이 포개진다.한 겹씩 멀어질수록 산은 평면에 가까워지면서 윤곽선만을 남기고,그 빛깔은 갈수록 아련히 깊어진다.글쎄,수묵화에서 이런 빛깔과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까?화암사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조용한 경치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