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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완주 종남산 송광사(終南山 松廣寺 ).전북 완주 본문

☆~ 절집.절터/전 북

완주 종남산 송광사(終南山 松廣寺 ).전북 완주

푸른새벽* 2006. 1. 13. 13:26

 




 







 

 







 




 

 







 

 




 




 




 




 




 




 

종남산 송광사(終南山 松廣寺)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


'송광사'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송광사는 전북 완주 종남산(終南山) 송광사이다.물론 두 절은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하지만 아무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한글은 물론 한자로도 '松廣寺'라고 같게 표기하고 있으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는 짐작쯤은 해봄직하다.송광사의 역사를 기록한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겨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昇平府.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뒷날 의발(衣鉢)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길"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했다.그런데 수백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정성을 다해 모연(募緣)하니 뭇 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고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伽藍)을 이룩하였다.


결국 보조스님과 인연이 닿아 있어 그뜻을 받들다보니 절 이름까지도 같게 되었다는 얘기다.아울러 우리는 이 비문 내용을 통해서 송광사가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음도 알 수 있다.비의 이름 자체가 '개창비'인데다 그것을 건립한 해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이니 이 사실에 착오가 있을 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한데 절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엉뚱하다.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 체징(普照 體澄,804~880)선사가 송광사를 창건했다는 얘기다.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체징스님이 할아버지뻘 되는 가지산문 개창자 도의선사를 창건주로 꼽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이런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이나 유적 또한 현재로선 전혀 알려진 바 없다.아마 체징스님과 지눌스님의 호가 같고,여기에 자기 절의 역사를 가능한 한 올려보려는 생각이 더해져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이른바 평지사찰이다.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세 눈에 들어온다.일주문,금강문,천왕문,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속으로 수렴된다.(다만 현재는 1998년 완공한 대웅전 앞 석탑이 대웅전 어간 일부를 가리고 있다)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엄정한 구조이다.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압방식이요,가람배치이다.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옛 백제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다.천왕문을 넘어서는 순간 어딘가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덮친다.날이 선 엄정성이 절 전체로 파급,확장되는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대웅전의 앞뒤로 흩어져 있는 전각들 -십자각,지장전,관음전,첨성각,오백나한전,약사전,삼성각 등-은 너른 대지 위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말 그대로 '흩어져' 있는 모양새이고,하나의 점 혹은 파편으로 존재할 뿐이다.그저 낱낱의 건물이 고립분산적으로 독립해 있을 뿐 건물들 상호간에 어떠한 유기적 연관성도 발견하기 어렵다.건축이 생활을 담는 그릇일진대 과연 이런 건축 구조와 수행공동체를 지향하는 불가의 생활방식이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적이 의심스럽다.


송광사 건축의 이러한 분산성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조선 후기에 창건된 탓인지 유감스럽게도 송광사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십자각을 제외하곤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강하게 비끄러맬 만한 것이 없다.말하자면 어느 건물도 이렇다 할 구조의 미 또는 공예적 장식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이럴 경우 그 약점을 보완,수정하여 강점으로 환치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집합성이다.별볼일 없는 것들이 기능적으로 결합될 때 생겨나는 힘,그것은 이를테면 군집의 미,집체의 미,그리고 조화의 미일 텐데,송광사 건축은 애석하게도 이런 미덕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반대로 산지가람이라면 덜 드러났을 고립성,분산성이라는 구조적 결함이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훨씬 강하게 노출되어 그 황량함이 두드러진다.


그러면 송광사의 가람배치가 창건 때부터 지금과 같았을까?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선 위에 가지런하게 건물들을 배치한 점으로 본다면 그밖의 건물들도 어떤 원칙과 조형 원리에 입각해서 위치가 정해졌을 법하다.물론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야 합리적이지 않겠는가.아무튼 지금의 송광사는 건물군이 보여주는 짜임새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고 최근에는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느낌이다.예를 들면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쓴 편액이 인상적이던 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더 크게 새로 지으면서 집을 오른쪽 뒤편으로 훨씬 물려 앉히는 바람에 다른 건물과의 연계성을 더 떨어뜨린 점이라든지 건축적 고려 없이 마당 가운데 세우면서 중심축을 벗어난 석탑이라든지
국적 불명의 쌍석등을 난립시키는 따위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요즘 사람들의 즉흥성과 안목 없음을 탓할밖에 별도리가 없으니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개 이상과 같은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송광사를 돌아본다면 공연한 실망을 덜 수 있음을 물론 소소한 재미와 소득이 없지는 않을 터이다.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일주문은 다포계 맞배지붕 양식이다.조선시대 다포계 건물의 경우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다.송광사 일주문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여 공포뿐만 아니라 서까래와 덧서까래,창방 뺄목 대신 고개를 내민 용머리,문의 앞뒤로 덧댄 보조기둥 따위들이 유난히 가늘어
일주문의 또 다른 인상은 일종의 가벼움이다.어딘가 모르게 진득하게 땅에 몸을 붙이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쉽게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기둥이 의식되지 않고 포작에 받쳐진 지붕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호이다.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절집처럼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여기 사천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塑造)이다.흔히 이곳 사천왕상을 소개하면서 뛰어난 사실성과 세부 묘사의 성실성을 언급하지만 글쎄 그게 다른 천왕상들과 뚜렷이 드러날 만큼 차이가 큰지는 모르겠다.흙을 이겨서 4m가 넘는 신상을 조성하면서 이 정도 성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하다.오히려 이 사천왕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제작연대가 분명하다는 설 때문이라 해야 솔직하리라.오른손으로는 당(幢)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寶塔)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편 끝자락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 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 1649년에 이들 사천왕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이로써 조선시대 소조 사천왕상의 기준작을 얻게 된 셈이고 이 점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1997년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다.


천왕문을 넘어서면 중정이고 그 너머 정면으로 대웅전이 우람하다.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절이 창건될 무렵 처음 지어졌고,1857년 중건되었다.꽤 큰 건물이다.외관에 걸맞게 기둥이 튼실하고 훤칠하다.그런데 어쩐지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제대로 조화가 맞았더라면 장중한 맛을 한껏 드러냈으련만 도리어 점잖은 도포 차림에 양태 좁은 갓을 쓴 것 마냥 어딘지 어색하다.처음 세울 때는 2층이었으나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건물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정치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물리고 그 위로 공포를 올려 다포집 전형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 집의 특색은 그 아래에 있다.즉 정면의 창방과 상방 사이 공간을 벽면으로 처리하고 각각의 칸을 균등하게 셋으로 나눈 다음 칸칸이 벽화를 채운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보통은 여기에 빗살무늬 교창을 둔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전패(殿牌) 또는 원패(願牌)라고 불리는,조각이 아름다운 목패(木牌) 세 개가 서 있다.왕,왕비,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이다.셋 모두 크기가 2m가 넘어 전패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화염을 날리며 구름 속에서 꿈틀대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앞면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뒷면에는 인조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 때인 1792년에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먹글씨가 남아 있다.크기로나 새긴 솜씨로나 또 만들어진 연대가 드러난 점으로나 눈여겨봄직한 유물이다.


그동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70호로 지정되어 있던 대웅전은 1996년 보물 제1243호로 등급이 승격되었고,대웅전 안의 삼존불상과 그 복장유물은 1997년 보물 제1274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절 건물 가운데 범종,목어,운판,법고의 네 가지 법구(法具),곧 사물(四物)이 비치된 곳이 범종각 혹은 범종루이다.엄격히 구분한다면 종각은 단층,종루는 누각 형태의 2층을 가리킨다.송광사에는 대웅전의 남서쪽,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비스듬한 앞쪽에 범종루가 있다.우리 전통건축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 평면을 채택하여,누마루를 경계로 아래위 동일선상에 12개씩의 누하주와 누상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짜올린 대단히 독특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다.


바닥이 지면과 별 차이가 없는 누각 아래층은 주춧돌과 기둥을 제외하면 거칠 것 없이 열린 구조이고 그 서북쪽 귀가 만나는 곳에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걸렸다.사물이 걸려 있는 누각은 면마다 돌아가며 간결한 계자난간을 돌렸다.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고 솟아오르는 용을 그려넣어 돋보이게 장식하였다.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질렀는데, 대들보 없은 이 건물에서 그 구실을 겸하고 있다.평방 위로 짜올린 공포는 갸날프게 휘어올라간 앙서형의 살미,두께가 얄팍한 첨차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섬약하다.또 서까래와 덧서까래로 가늘고 길어 연약해보인다.그러나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울림을 전혀다르다.기둥 사이의 간격이 2.5m, 따라서 한 면의 길이가 7.5m 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집에 귀공포가 여덟 군데나 놓이고 기둥 사이마다 주간포를 짜올렸으니 처마밑은 공포로 빼곡하여 섬세하고 현란하며 화사하다.공포를 구성하는 낱낱 부재가 가볍다보니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느낌도 가뿐하고,산뜻하고,날렵하다.마치 범상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고된 훈련 끝에 부르는 화려한 합창 같고,보잘것없는 풀꽃들이 가득 모여 이룬 커다란 군락 같다.밀집한 공포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종루는 1857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함께 중창된 것으로 전해온다.종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6년 '완주 송광사 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승격되었다.십자형 평면으로 말미암아 십자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대웅전을 옆으로 비껴 절의 동북쪽 귀퉁이로 빠져나가면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개창비'를 만날 수 있고,거기서 내쳐 걸으면 긴 돌각담에 둘러싸인 이 절의 부도밭이 나온다.송광사개창비는 절의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에 세워졌다.


송광사는 진입부의 정연함과 중심부의 산만함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사찰이다.진입부에서 가졌던 기대와 긴장이 중심부에서 여지없이 풀려버리는 그런 곳이다.건물과 건물이 짜임새 있게 맞물려 돌아가야 거기에 생활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절이다.설사 여러 점의 유물이나 유적이 가치 있고 볼 만하더라도,그것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그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송광사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