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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위봉사(威鳳寺).전북 완주 본문

☆~ 절집.절터/전 북

완주 위봉사(威鳳寺).전북 완주

푸른새벽* 2006. 1. 4. 00:07

 




 




 




 




 




 




 



 

추줄산 위봉사(威鳳寺)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

 

주줄산(珠茁山) 남쪽 기슭에 자리한 위봉사(威鳳寺)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거찰이었다. 조선총독부가 30본말사법을 시행할 때 위봉사는 전북 일원의 46개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本寺)의 위상을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각종 화재로 인해 수난을 당하면서 거의 모든 전각이 없어졌다가 근래들어 다시 중창불사를 진행해 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행정구역상 소재지는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산21번지이며,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에 속해 있다.

위봉사가 자리한 주줄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해발 524m의 규모이지만, 전주 8경의 하나인 위봉폭포와 1675년(숙종 1)에 축조된 위봉산성이 위치해 있어 전북지역의 대표적 명산으로 꼽힌다. 특히 동학혁명 때는 위봉산성의 행궁(行宮)이 퇴락해 있자 위봉사가 행궁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주줄산은 추줄산(峰峰山)으로도 불렸으며, 지금은 위봉산(威鳳山)이라는 산명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위봉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먼저 『범우고(梵宇攷)』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위봉사는) 위봉(圍鳳)이라고도 한다. 속전에 의하면 산으로 형세가 사방이 둘러싸여 있고, 처음 창건할 때 마침 봉황새의 이적(異蹟)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초 전주의 최용갑(崔龍甲)이 명산을 유람하다가 이 터를 얻고 처음 암자를 건립하였다.


이후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이 곳을 지나다가 지형의 아름다움에 탄복하였으며, 석잠(釋岑) 스님이 구조를 고쳤다가 승숭(僧崇) 스님이 거찰로 만들었다. 산내에는 북암(北庵)·달마암(達摩庵)·승가암(僧伽庵)·익수암(益水庵)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정년간(至正年間, 1341~1367)에 창건된 것들이다.


다소 후대의 자료이긴 하지만 『범우고』에서는 최용갑이라는 인물이 처음 암자를 세웠으며, 이후 고려 후기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중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현존하는 「위봉사극락전중수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868년(고종 5) 포련(布蓮) 스님이 지은 이 중수기에서도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최용각(崔龍角)이라는 인물이 신라 말에, 보제존자 나옹화상이 고려 말에 각각 중창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범우고』의 ‘최용갑’과 중수기의 ‘최용각’이라는 인명이 조금 틀리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규모가 전사(殿舍) 28채, 외암(外庵) 10여 개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어 위봉사는 이미 고려 말부터 거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나옹화상의 위상 때문인지 <추줄산위봉사사적사(峰峰山威鳳寺事蹟詞)> 병서(幷序)에는 ‘이 사찰은 고려 말 왕사였던 나옹스님이 창건하였다.’라는 표현이 있어 나옹화상을 창건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경 자수(無竟子秀) 스님이 지은 『무경집(無竟集)』에 수록된 이 자료 역시 절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인데, 이상의 자료를 종합해 볼때 위봉사와 나옹화상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최용갑’ 또는 ‘최용각’이라고 표기되는 인물은 위봉사 창건 시기의 시주자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편 최근 들어 각종 자료에는 604년(백제 무왕 5)에 서암대사(瑞巖大師)라는 분이 이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자료적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내용이다. 유일한 전거로 권상로(權相老) 선생의 『한국사찰전서』가 보이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자료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그 창건주도 서암대사가 아닌 서응대사(瑞應大師)라는 인물로 표기되고 있다.
아무튼 604년 창건설은 앞으로 보다 많은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한다.

*대한불교진흥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