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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다

도솔산 선운사(兜率山 禪雲寺 ).전북 고창 본문

☆~ 절집.절터/전 북

도솔산 선운사(兜率山 禪雲寺 ).전북 고창

푸른새벽* 2006. 4. 15. 00:08

 

 






 






 






 






 






 






 






 






 






 






 






 











 






 

 











 

 











 

 






 











 






 






 






 

 











 

 






 

도솔산 선운사(兜率山 禪雲寺)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우리 나라 사람에게 가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언제나 몇째 손가락안에 꼽히는 선운사.그 답사는 이 고장 질마재마을 출신 서정주 시인의 육필 원고를 확대하여 새겨놓은「선운사 동구」시비에서부터 시작 된다.시비는 제목 그대로 선운사 동구에 세워져 있다


선운산.일명 도솔산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평소 친하던 신라의 의운국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도 하다


다분히 후대에 형성되었을 창건설화에 따르면,죽도포(竹島浦)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올리려 했으나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지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나한상,옥돌부처,금옷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모시면 길이 중생을 제도,이익케 하리라" 고 씌어 있는 편지가 나왔다.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더 지금의 절터를 메워 절을 세웠고,이때 진흥왕은 재물을 내리는 한편,장정 100명을 보내 공사를 돕고 뒷산의 소나무로 숯을 구워 경비에 보태게 했다.


하나의 설화는 또 다른 전설로 이어져,동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는 자연석굴은 검단선사가 연못을 메우던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도망 가느라고 뚫어놓은 것이라 하여 용문굴이라 불린다.


한편,절을 세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들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는 이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 반성한 도적들이 소금을 구우며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며 그들은 해마다 봄 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으로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실제로 해방 전까지도 그 일대 염전 사람들은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


그후 고려 충숙왕 5년(1318)에는 행호선사가 쑥대밭이 된 절터에 서 있는 구층석탑을 보고 분발하여 대대적으로 중창했지만 정유재란을 맞아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다시 광해군 5년(1613),무장현감 송석조가 원준대덕과 함께 3년에 걸쳐 절을 재건한 수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른다


매표소를 지나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부도밭이다.얼마전 까지 추사 김정희의 백파스님의 부도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선운사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한창 번성하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지금은 도솔암,참당암,성상암,동운암 등 4개의 암자와 석탑,그리고 본절 경내에 천왕문,만세루,대웅전,영산전,관음전,팔상전,명부전,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절 안의 중요 불전들은 모두 맞배지붕 집이며 각 건물 전면 간살 사이의 비례도 대웅전의 형식을 따라 동일하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선운사를 말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꽃이다.선운사 입구 오른쪽 비탈에서부터 절 뒤쪽까지 약 30m 너비로 군락을 이룬 3천 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은 수령이 500년 가량 되며 4월 말이면 저마다 복스러운 꽃을 내민다.피었을 때 고운 동백꽃은 질때도 송이째 뚝뚝 떨어져,가슴을 치는 서운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게 한다.이곳의 동백나무 군락은 동백나무 자생지로는 최북단에 위치하며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음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