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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바람소리/궁궐(宮闕) (86)
바람처럼 떠나다
준명당(浚明堂)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전각들을 새로 짓던 시기, 즉 1897년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준명당은 경운궁의 편전 성격을 띤 내전의 하나로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정사를 보살피던 곳인데 현존 건물은 1904년의 화..
중화전(中化殿) 중화전은 경운궁의 정전으로 대한제국시대 고종만이 이곳에서 조하(朝賀)를 받았다.조선시대 궁궐의 정전,즉 경복궁의 근정전,창덕궁의 인정전,창경궁의 명정전,경희궁의 숭정전이 모두 가운데가 '政' 자 돌림이지만 경운궁의 정전 중화전만이 그 틀을 깼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한 이후 중화전 등 주요 전각들이 본격적으로 중건되기전 까지 5년 남짓의 기간 동안 즉조당 이 정전으로 사용되었다.그러나 황제국을 칭하면서 국가의 중흥을 도모하던 고종은 이에 만족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치조 공간의 영전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중화전 일곽은 광무 6년(1902)에 창건되었다.창건 당시의 중화전은 중층으로서 경복궁의 근정전,창덕궁의 인정전에 견줄한한 규모였다.이때,중화전 행각 128칸과 중화문,조원문 ..
중화문(中化門) 대한문 안 돌다리를 건너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꺾어 중화문이 남향으로 앉아 있다.대한문에서 중화전에 이르는 길도 어로(御路)가 형성되어 있어야 마땅하나 그렇지 못하다 중화문은 경복궁의 근정문,창덕궁의 인정문,창경궁의 명정문과 같은 성격의 전문(殿門)이다.즉,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化殿)으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원래는 좌우로 행각이 늘어서 있었으나 현재는 중화문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광무(光武)6년(1902) 7월에 정초하고 8월에 상량하였으나 1904년의 화재 때 소실되었다.이후,중화전이 복구될 때 중화문도 같이 중건(1906)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인 중화문은 장대석 세벌대로 기단을 높이 세우고 둥근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다 단층의 약..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은 동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이 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또한,원래는 덕수궁의 정문이 아니었다.광화문(光化門).돈화문(敦化門).황화문(弘化門).흥화문(興化門) 등 다른 궁궐의 정문들처럼 이름 가운데 '화(化)'자가 들어 있던 인화문(仁化門)이 정문이었다.그 위치는 중화전과 함녕전 사이쯤에서 내려다보이는 남쪽이었으며,남향 문이었다고 한다 정전인 중화전을 건립하지 않고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할 때까지는 삼문(三門)형식을 갖추지 않은 인화문이 정문이었던 것이다.그러나,고종이 덕수궁에 이어한 이후 궁궐을 중건하면서 중화전과 중화문을 새로 짓고 외삼문(外三門)으로 조원문을 세워 법전(法殿)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이어 인화문 자리에는 건극..
덕수궁德壽宮(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은 서울에 남아 있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덕수궁의 돌담길 또한 원래는 덕수궁 영역의 일부로 1922년 일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璿源殿)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 생긴 길일뿐 유서 깊은 궁궐의 외곽 길이 아니다.일제는 우리의 지배권을 강탈한 뒤 덕수궁터를 조직적으로 분할 매각했는데 이는 궁궐이 지니고 있는 국권과 자치능력의 상징성을 파괴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다.그 결과 매각된 터에는 현재의 모습처럼 외국 공사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최근 미국대사관과 아파트 신축 부지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선원전터와 주변 일대..
동십자각(東十字閣) 경복궁 궁장(宮墻)의 동남 모서리에 있었던 망루(望樓)가 동십자각(東十字閣)이다 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단층 누각으로 이익공계 양식이다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아래 기단은 장대석을 7겹으로 쌓아 방형의 축대로 형성하고 그 위에 세 줄의 십(十)자형을 투각한 전축 여..
팔우정(八隅亭) 집옥재 서쪽의 중층 복도로 연결된 중층 팔우정은 팔각 판석을 기단 삼아 넓게 깔고 그 위에 장방형에 가까운 초석을 놓아 역시 팔각 기둥으로 건물을 받쳤다 전체 여덟 면에는 사분합 창호를 달았으며 바깥쪽으로는 쪽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렀다 위층은 계자각 난간이고 아래층은 평..
집옥재(集玉齋) 옛 건청궁이었던 터 서쪽에 위치한 집옥재는 고종의 서재로 활용되던 전각이다.현재는 건청궁 터와 담장으로 막아 다른 공간처럼 구획되어 있다.고종 연간에 건립되었으며 『궁궐지(宮闕志)』에는 정면 5칸 50척,측면 4칸 30척의 규모로 설명 되어 있다 집옥재는 흥선대원군이 중국의 건축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지었다는 설이 있을 정로도 중국풍을 흠씬 풍긴다 장방형의 돌기단은 궁궐 건축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대석.면석.갑석등을 갖추었다.건물의 초석도 특이하게 북 모양을 하고 있는데 장방형의 기단 위에 장대석 한벌대를 다시 들어 놓고 그 위에 얹었다.네모꼴 초석 위에 다시 항아리 모양을 한 석재를 올려 둥근 주좌를 튼 집옥재의 이중 초석은 보기 드문 형태이다 *이덕수 지음 '新궁궐기행'중에서*
향원정(香遠亭) 집경당.함화당 북쪽으로는 커다란 연못 향원지(香遠池)가 전개되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정자가 서 있으니 곧 향원정(香遠亭)이다 연꽃을 심은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향원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향원익청(香遠益淸.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경복궁에 있는 두 개의 큰 연못 가운데 세운 누각 중 경회루가 웅장하면서 남성적인 데 비해 향원정은 아늑하며 여성적인 분위기이다.경회루가 사신을 접대하는 등 공적인 공간인데 비해 향원정은 휴식을 취하던 사적인 공간이었다 향원지는 네모꼴 연못이며 그 가운데 작은 동산을 둥글게 형성하여 향원정을 이중으로 앉혔다.네모 연못의 둥근 섬은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개..
십장생(十長生) 굴뚝 자경전 건물의 북쪽 담장에 조성되어 있는 십장생(十長生) 굴뚝은 보물 제 810호로 지정되어 있다.이 굴뚝은 담장 일부분을 장방형으로 구획하여 마당 쪽 앞으로 한단을 돌출시켜 장대석 낮은 기단 위에 벽돌을 쌓고, 그 위에 기와 지붕과 연가(煙家)를 얹었다 벽면의 규모는 너비 3.81m,높이 2.36m,두께 65cm이다.벽면의 제일 아랫 부분에는 좌우에 각각 불가사리 벽사상을 전(塼)으로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 벽면의 중앙 부분에 가로 3.03m,세로 88cm의 직사각형 공간을 구획하였다 그 공간에 회벽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해.산.구름.바위.소나무.대나무.거북.사슴.학.불로초 등을 제각기 다른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였다.이들 십장생 외에도 연꽃과 포도 문양도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