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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바람소리/궁궐(宮闕) (86)
바람처럼 떠나다
진선문(進善門) 금천교를 지나면 곧 진선문(進善門)이 좌우 각 6칸의 행각과 함께 서향으로 위치해 있다 저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단층 겹처마 팔작 지붕 건물이다 두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용두,잡상을 배열하였다 문을 들어..
금천교(錦川橋) 돈화문을 들어서 북쪽 방향으로 60~70m 정도 가다가 동쪽 즉,오른쪽으로 직각으로 꺾어 들면서 바로 금천교(錦川橋)가 있다.『太宗實錄(태종실록)』에 따르면,태종 11년(1411)에 박자청(朴子靑)의 감독으로 진선문 앞에 축조되었다 금천교의 규모는 길이 13m 폭 12m 정도이다.창덕궁의 서북쪽에서 명당수가 흘러드는 어구(御溝) 즉,금천의 한가운데 돌로 기초를 놓고 두개의 홍예를 틀어 올렸으며,기반석 위 남쪽에는 해태 같기도 하고 하마 같기도 한 돌짐승을,북쪽에는 거북 혹은 현무 모양의 돌짐승을 배치하였다.경복궁의 영제교(永濟橋)가 남북 방향인데 비해 금천교는 동서 방향으로 놓였다 홍예가 가운데로 모이는 곳에 역삼각형의 귀면(鬼面)을 양각하였고 동자기둥 아래 멍엣돌에는 수두상(獸頭像)을 ..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敦化門)이다.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으로 남향 건물이다.좌우 양쪽의 협칸을 벽체로 막았으나,우리나라 궁궐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에 이르는 문은 돈화문밖에 없다.태종 12년(1412)에 창건된 이 문은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보존되어 있는 궁궐 정문으로 중시되고 있다.즉,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한 선조 40년(1607)에 가장 먼저 복구되었는데 이때의 건물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 창건 당시 돈화문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점차 개축되면서 현재의 규모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태종 13년에는 돈화문에 무게 1만 5000근의 동종(銅鐘)을 걸고 아침저녁으로 인경을 쳤다는..
( 창덕궁의 많은 전각들을,그것도 후원(後苑)까지 포함해서 1시간 30여분 남짓의 관람시간(강제조항)으로 돌아보기에는 너무 버거웠다.대충 세어봐도 열 일곱개나 되는 전각들인데 안내 받을 수 있는 건물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후원제외) 그나마 안내인의 설명이라는 것이 어쩌면 제한된 동선을 따라가며 숨가쁘게 진행되는지라 각 전각의 편액 사진을 찍는 것 조차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4월에는 나 같은 사람들도 편안하게 돌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하니 그 때를 기다려보는 수 밖에.우선 몇 컷 밖에 안되는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 창덕궁(昌德宮) 조선 건국 초기,개경에서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이 도읍을 다시 한성으로 옮기면서 응봉(鷹峰)자락 향교동(鄕校洞)터에 이궁(離宮)으로 조성한 궁궐..
석조전(石造殿)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덕수궁에 건립된 서구식 건물 중 현재의 궁역(宮域)안에 남아 있는 것은 정관헌과 석조전 뿐이다 석조전은 중화전의 서북쪽 방향,준명당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석조전은 1900년부터 1909년에 걸쳐 건립되었으며,당시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영국인 총세무사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이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발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설계자 역시 영국인인 하딩(Harding. G.R.)이다.시공은 일본의 오오 쿠라구미 가 했으며,심의석(沈宜錫).일본인 오가와.영국인 데이비슨(H.W. Davidson)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등이 감독을 하였다.건물 내부 설계는 영국인 로벨(Lovell)이 맡았으며,그 공사는 영국의 크리톨(..
정관헌(靜觀軒) 함녕전 뒤 북서쪽 방향으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정관헌(靜觀軒)은 연유(宴遊)장소로서 전통적 건축 양식과 서구적 건축 양식이 절충된 특이한 형태의 벽돌조 단층 양옥이다.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3면이 개방되어 있다.장대석 세벌대 기단 위에 둥근 돌기둥을 세웠다.지붕은 안쪽 돌기둥이 받친 부분에만 팔작 형태로 씌웠으며 기단 위쪽은 지붕을 덧달아내 퇴를 구성하여 구리로 만든 난간으로 동.서.남면을 둘렀다 건물 네 면에 각각 돌계단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북쪽 면의 계단은 벽돌로 둘러막은 내실로 통한다.난간에는 소나무.당초.사슴.박쥐 등의 다양한 전통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난간동자기둥 위에는 나무를 깎아 코린트식 오더를 기둥머리까지만 만들어 세웠으며 그 위에는 다시 네모난 나무 기둥을 세웠..
함녕전(咸寧殿) 함녕전(咸寧殿)은 경운궁의 침전 건물이다.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립되었으나,1904년 이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소실되었다.이 해 4월 14일 함녕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수리한 온돌에 불을 지피다가 失火하여 함녕전은 물론 경운궁의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는 큰불로 번졌던 것이다.그러나 당시의 전각들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람이 거세었다고는 해도 그 피해 범위가 엄청나게 넓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방화가 아니었나 하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경운궁에 유독 애착을 가졌던 고종은 다른 궁궐로의 이어 권유를 물리치고 화재가 난 다음날 경운궁중권도감을 설치하여 중건공사에 착수토록 독려하였다.함녕전은 불에 탔던 그해 중건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4칸에 뒷..
덕홍전(德弘殿) 덕수궁의 편전 역할을 하던 덕홍전은 중화전의 동쪽,함녕전의 서쪽에 남향으로 위치해있다.고종이 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하면서 주로 내외 귀빈을 접견하는 처소로 사용되었다.109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는지의 여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현존 건물은 1911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렇다면,덕수궁 안에서 가장 늦게 건립된 전각이다 건물 앞 기단은 2층으로 형성하였는데,양쪽에 소맷돌을 설치한 돌계단으로 오르는 아래 기단은 화강석 장대석을 두벌대로 쌓았으며 좌우 측면에도 돌계단을 놓아 소규모 월대처럼 구성하였다.안쪽 기단은 장대석 세벌대로 쌓았으며 그 위에 네모 뿔대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공포는 이익공 양식이다 덕홍전은 정면이 3칸인데 비해여 측면이 4칸이다.즉,정면은 기..
석어당(昔御堂) 정전인 중화전의 동북쪽 바로 뒤에는 석어당이 위치해 있다.임진왜란 때 몽진길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서 거처하였다 당시의 궁핍한 사정 때문에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중건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16년을 보낸 선조는 재위 41년 찹쌀떡을 잘못 먹고 기도가 막혀 승하하였다 또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건물이기도 하며 계해 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날 때 석어당 앞마당에 꿇어앉아 36조의 죄를 열거한 뒤 인조에게 옥새를 전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건물은 1904년의 화재로 불타 버렸으며 현재의 건물은 같은 해에 옛 모습대로 중건한 것이다.현판 글씨는 김성진이 쓴 것으로 전해온다.경운궁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2층 목조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창덕궁의 인정전 등은 중층 구조이나 그 내부가 통칸인..
즉조당(卽祚堂) 임진왜란으로 의주(義州)까지 몽진했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 환도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1623년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광해군이 뒤를 이어 이곳에서 인조가 등극한 이후부터 즉조당(卽祚堂)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조가 덕수궁으로 이어하기 전,고종이 각각 선조 환도 삼주갑과 오주갑 때 이곳에 와서 선조임금을 회상하며 배례를 올리기도 하였다.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한 뒤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 건물을 정전으로 활용하였으며 건물 이름도 태극전(太極殿).중화전 등으로 바뀌었으나 1902년에 중화전이 건립된 이후로는 다시 즉조당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된 이후 같은 해 중건한 것이다.현재,즉조당에는 광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