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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시 남산동 1130
- # 경주시 남산동 227-3
- #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 #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 # 금동반가사유상
- #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 #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 240
- # 전북 익산시 모현동 1가
- # 중초사지 당간지주
- #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 # 칠곡 송림사전탑
- #'기축'명 범종
- #17세기 불상
- #18세기 중반 불화
- #2017 박물관전시
- #2017국립민속박물관 전시
- #2017년 민속박물관전시
- #7세기 전반 금동불
- #8세기 중엽 석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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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불쌍한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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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당간지주 (114)
바람처럼 떠나다
경주 동천동당간지주(慶州 東川洞幢竿支柱) 경주시 동천동 507-7 (표암재 내) 당간지주는 원위치에서 옮겨져 경주시 동천동 표암재에 남아 있다.현재 1주만 남아 있는데,다른 석조물과 함께 석축의 일부 부재로 활용되었다가 최근에 노출되었다.당간지주가 다른 용도로 전용이 쉬워 인근..
경주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慶州普門洞 蓮華文幢竿支柱)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보문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 사지에서 가까운 지점이다.지금도 보문사지에는 금당지를 중심하여 동서에 탑지가 남아있고,경루지도 있다.그리고 여기저기에 석등 대석과 원좌가 마련된 초석,..
경주보문리당간지주(慶州普門里幢竿支柱) 경주 남쪽으로 명활산 가까이에 진평왕릉이 있고,여기서 남쪽으로 넓게 트인 뜰이 신문왕릉까지 이어져 있다.이 넓은 뜰은 보문뜰로 불리는데,특히 금당평 일대가 보문사지로 전해진다.실제 이곳에서는 1916년 11월 '보문'이라는 명문 기와가 출..
황복사지 당간지주(皇福寺址 幢竿支柱) 경북 경주시구황동 103 황복사는 652년 의상(義湘)이 출가한 사찰이며,경문왕의 시신도 여기에서 화장하였다고 한다.그리고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 명문에 의하면 석탑은 692년 죽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그런데 신문왕..
공주 구룡사지 당간지주(九龍寺址 幢竿支柱) 공주의 구룡사지 당간지주가 서 있는 일대는 발굴 조사로 대략적인 사지의 규모가 드러났는데 '구룡사(九龍寺)'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구룡사임을 알게 되었다.현재 사역은 마을로 변하였는데,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에서 법당골까지가 원..
공주반죽동당간지주(公州班竹洞幢竿支柱).대통사지당간지주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는 성왕 때 양나라의 무제(武帝)를 위하여 창건되었다는 대통사지(大通寺址)로 추정되는 곳에 서 있다.대통사는 527년 이나 529년에 창건된 사찰로 웅진시기 백제 불교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찰로 인식..
영광 단주리 당간지주(靈光丹朱里幢竿支柱) 단주리 당간지주는 논 가운데 서 있는데 원래는 전체 높이가 1212cm에 달하였다고 한다.그런데 1945년 7월경 태풍으로 석당간의 윗부분이 부러져 쇠고리로 연결하여 놓았는데 이후 다시 상단부가 파손되어 없어졌다고 한다.현재는 당시 석당간이..
장의사지 당간지주(莊義寺址 幢竿支柱)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장수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59년(무열왕 6) 한산주(漢山州)에 창건된 사찰이었다.고려시대에도 장의사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예종,인종,의종 등이 다녀갔다.그리고 고려 초기 광종(9..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安東 雲興洞 幢竿支柱) 안동 운흥동당간지주는 안동역 서쪽 편 공원 내에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과 같이 서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지주부의 상부가 심하게 파손되었다고 한다.당간지주와 전탑은 동일 사찰의 유물로 보이는데 아직까지 사명寺名은 알 수 없다.다만 ..
고창 흥덕당간지주(興德幢竿支柱) 고창군 유형문화재 제36호 흥덕당간지주는 고창군 흥덕면 교운리 마을 흥덕향교 입구에 서 있다.당간지주의 위치와 주변 지형으로 보아 향교와 교운리 마을 일대에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다만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이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갈공사(葛空寺)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러나 갈공사와 관련된 기록이나 유적이 없어 구체적인 연혁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두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기단이 남아있지 않아 원래부터 마련하지 않았는지 유실되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이다.다만 지주 하단부의 치석 수법으로 보아 최초 건립 시부터 기단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즉,두 지주 하단부를 깊게 땅에 묻고 간대석을 마련하여 당간을 세웠던 ..